송복섭 교수 |
유추해보건대, 모든 것이 불확실하던 시대에 예측 가능한 안전한 미래를 담보하기 위해 의리를 숭고하게 바라보는 생각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배신이 넘쳐나던 난세에 의리는 중요한 미덕으로 강조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충과 효의 가치를 철학적 원리로써 온 백성에게 가르치고 절대시했다.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는 삼국지연의의 장엄한 출발점이 되고, 남편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구혼자를 물리치느라 20년이 지나도록 옷을 짜고 풀기를 반복했던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는 서양 여성 의리의 상징으로 남았다. 심지어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주인에게 보은하는 까마귀와 진돗개의 의리도 칭송한다.
그런데, 의리를 강조함은 한편으론 그것이 누군가에게 이득이 되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이도 있지 않을까? 노은희 PD는 '의리가 밥 먹여 주는 한국사회'라는 글에서 '이 아름답고 정교한 의리의 네트워크에서 피해자는 없다. 그들은 모두 뭔가를 주고받았다. 피해자는 네트워크 밖에 존재한다.'라고 지적한다. 누군가는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의리를 지키자니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에 내몰리거나,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희생이 동반되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그리하여 '의리가 밥 먹여 주냐?'라는 말이 생겨났다.
어느새 의리를 지키느라 자신을 몫을 챙기지 못하는 사람을 바보로 취급하는 세상이 되었다. 오랜 세월 호형호제하다가도 불리한 상황이 되면 온갖 내밀한 치부를 들춰내는 모습을 자주 마주한다. 내가 덜 다치기 위해 의리를 저버리는 단계를 지나 남들은 관심 없는 사실도 굳이 드러내어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는 일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한때는 의리를 저버림에 미안해하는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났다면, 이제는 당당한 투사의 모습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교통사고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해 억지를 부리다가 기록영상을 확인한 다음에도 사과가 아닌 배짱으로 일관하는 일도 일상에서 겪는다. 더는 의리가 필요 없는 세상이 오는 걸까?
구한말을 되짚어 본다. 무도한 열강이 힘을 내세워 침탈의 기회를 엿보던 시절, '안에서 썩어 망했다'라는 식민사관 정도는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는 판단 아래 부화뇌동하던 무리가 있었음을 안다. 새로운 세상이 몰고 올 변화가 자신에게 이득이 될지도 모른다는 지식인의 인식과 방관이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고 본인의 운명도 주체적으로 건사 못하는 꼴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율리우스 시저의 '갈리아 전기'를 보면, 점령할 갈리아 지역의 풍토와 부족의 습성을 자세히 분석하는 대목을 만나게 된다. 그 결과 각 부족을 이간계로 쉬이 평정할 수 있었다. 갈리아인은 민족 전체의 역사와 정체성보다 제 부족의 이익을 우선하여 이웃 부족과 반목하다 남의 손에 망하게 된 것이다.
세상에는 이익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많이 있다. 인간의 뇌에는 끊임없이 삶의 가치와 의미를 탐구하는 회로가 작동하고 있음을 최근의 뇌과학 연구가 밝혀냈다고 한다. 이익추구는 수단일 뿐 목표가 될 수가 없다. 소금물을 들이키는 것과도 같아서 도달할수록 더한 갈증을 느껴야 하는 구조다. 가까운 이익에 매몰돼 숭고한 의리를 저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의리의 아이콘 김보성에 열광하는 배경에는 각자도생의 이익사회에서도 희미해져 가는 의리의 가치를 우리가 여전히 염원하는 증거다.
/송복섭 한밭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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