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변호사 |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매일매일을 살아내다 보면 그 다음 날이 그닥 기다려지지 않는다. ‘주어진 역할 속에서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았다’는 정도의 의미를 건질 수 있을까. 어떤 소설가는 소설을 왜 읽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삶을 견디는 힘'을 갖게 해준다는 말을 했는데 수긍이 간다(물론 그것이 꼭 소설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세상을 인과관계로 인식한다. 어떤 일이 발생하면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세상이 진짜 인과관계로 이루어졌는지 아닌지는 잘 모른다(양자역학에서는 이 세상은 확률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런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던 오래된 방법 중 하나가 '이야기'다.
우리는 늘 이야기를 한다. 나에 대해서, 남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오래전 사람들은 세상을 설명하는 원인으로 '신'을 선택했고, 신화라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지금 사람들도 신을 말하기는 하지만, 현재 그 자리의 대부분은 '과학'이 차지했다.
'이야기'를 단순화하면, '처음-중간-끝'이라는 형태를 가진 발화 내지 언어의 구조물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기승전결도 같은 말이다.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가 뚜렷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대표적으로 권선징악이 있다. 착한 사람은 잘 되고 나쁜 사람을 벌을 받는 이야기이다. 이만큼 뚜렷한 인과관계가 없다. 인과관계 속에서 세상을 파악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다.
다시 우리의 삶으로 돌아가,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든다면 어떨까. 어떤 원인과 결과를 찾아낼 수 있을까. 하루 24시간, 일주일, 일년. 우리의 삶은 반복적이고 별다른 목적이나 인과관계도 없이 흘러가는 듯하다. 뚜렷하지가 않고 지리멸렬하다.
그 안에서 나의 이야기를 찾고 만드는 일은 중요하다. 내가 만든 세상 속에 나를 위치시키고 그 의미를 찾는 작업이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의미 부여의 과정이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는 의미의 부여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 바깥의 세상을 내 안에 다시 구성한다. 세상은 나와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것 같지만, 나 없이는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종특(종족특성)이다.
서울 살 때의 일이다. 그때는 버스를 갈아타고 한 시간 반 정도를 가거나, 지하철로는 한 시간 정도 되는 거리의 직장을 다녔다. 먼 거리를 이동할 때는 멍하게 있을 때도 많지만,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오를 때도 많다. 그날은 지하철을 탔고, 지하철 차창가에 조그만 황동색 열쇠 하나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 놓고 갔겠거니 생각을 하다가, 내가 소설가라면, 주인공이 인생의 한 기점에서 어떤 열쇠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일종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장면을 써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별일처럼 여겨지는 순간의 발견이었다.
특별한 인생을 살지는 않았다. 그다지 외향적인 인간형도 아니어서 나서서 새로운 경험을 하지도 않는 편이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해나가고 쌓아가면서 나 나름대로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좋아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연결하고, 세상 속에 나를 위치시키는 작업이다. 매우 주관적인 작업이지만 나에게는 삶을 견뎌내는 방법이다.
좋은 기회를 통해 귀중한 지면을 얻게 되었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한 사람으로서, 혹은 변호사로서 얻은 여러 이야기들을 지면을 통해 가끔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지면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통해 공감하거나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이진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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