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홍철 한밭대 명예총장 |
1994년 5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적십자회담에서 북측 대표인 박영수는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발언 직후(5월 23일) 이병태 당시 국방부 장관은 대한민국 국회 증언에서 전쟁 계획의 핵심을 공개적으로 설명하였는데, 이는 주한 미군사령부를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 발언은 북한에 대한 경고이자 전쟁 억제책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관심을 끈 것은 이것이 1급 비밀에 속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미국은 폭격기나 미사일을 이용한 북한 핵시설 폭파 계획을 세우는 등 전쟁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4월 중순 패트리엇 미사일을 선적한 배가 부산항에 입항하였고, 공격용 아파치 헬기 한 부대의 한반도 배치 등을 포함하여 중형 탱크, 신형 레이더 추격 장비 등을 추가 배치하였습니다. 아울러 주한 미국인 소개(疏開) 계획까지 수립하였습니다.
5월 18일 미 국방부 장관과 합창 의장은 일부 해외 주둔 미군 사령관과 미 군부대의 모든 현역 4성 장군들, 그리고 해군 제독들을 국방성 회의실로 소집하였는데, 당시 회의에 참여한 해군 대장의 증언에 의하면 이 회의는 단순한 도상 훈련이 아닌, '실제로 어떻게 전략을 수립할지를 결정하기 위한 실전 회의'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 회의 결과를 상부에 보고했는데,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최초 3개월간 미군 사상자 5만 2,000명, 한국군 사상자 49만 명이라고 추산했고, 군비는 61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보이며, 그 중 극히 일부만을 동맹국의 지원금으로 충당할 것"이라는 관측이었습니다. (돈 오버도퍼·로버트 칼린, <두 개의 한국> 참조)
이런 상황에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전쟁만은 안 된다고 설득했습니다. 그런데도 클린턴이 대북 제재 쪽으로 마음을 굳힐 무렵, 지미 카터 대통령이 등장하여 클린턴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방북하여 김일성과 회담을 하는 급진전을 이뤘습니다. 당시 69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무대로 왕성한 활동을 펼친 카터는 이미 중동 등에서 평화 중재자의 역할을 완수한 바 있습니다.
6월 15일 드디어 김일성은 미국이 구상한 핵 동결안을 수락하고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동의하여, 폭발 직전의 대치 국면을 진정시켰습니다. 카터와 김일성이 작별 인사를 나눈 지 3주를 지나지 않은 7월 6일 김일성은 사망하였지요.
드디어 김일성은 극적으로 카터와의 협상을 타결하였는데, 이렇게 급진전 된 데에는 북한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이 반영되었습니다. 94년 봄, 날로 증강되는 미국 군사력과 긴장의 고조는 북한에 위협을 주었으며, 군사적으로는 매우 불리한 국면이 조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1994년과 지금의 한반도 상황의 다른 점과 유사한 점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이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 '힘'과 '외교'의 복합적 전략을 사용해 대응한다는 점은 유사하나, 중국과 일본의 대응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당시, 중국은 노련한 외교술을 발휘하여 북한의 행동을 제약했고, 일본은 헌법상 규정과 정치적 제약 때문에 미국의 군사 작전에 내놓고 참여하는 것을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견고한 한미일 연대와 북중러 연대와는 강도와 구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반도 문제 보도에 천착했던 고(故) 돈 오버도퍼 전 워싱턴 포스트 기자는 당시 한반도 위기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북한은 세계 최강인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여 '세계에서 가장 실패한 나라'에 양보하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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