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균 단장 |
지역과 혈통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특수 사정을 감안한다면 예견된 결과였다. 아마도 당시 이런 인터넷 여론조사가 있었는지도 모를 국민이 대다수였을 것이다. 대신 관계있는 사람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강원도 강릉과 경기도 파주 지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신사임당이 충남 천안의 지지를 받은 유관순과 경쟁해서 이겼다. 인구수로 보자면 천안이 강릉이나 파주보다 적지 않았음에도 진 것은 참여율과 결집력에서 밀린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해당 가문의 열성적인 노력도 크게 작용했다. 가족들이 몰살했거나 피해를 당한 애국지사 가문이 소문난 명문가와 비교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 신사임당의 시댁 덕수이씨 가문은 이미 100원짜리 동전(이순신)과 5천원권 지폐(이율곡)에 오른 유명 가문이다. 여기서 다시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는 것은 그 또한 누구 못지않은 역사 속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 당시 해당 지역의 관심이 덜했다면 앞으로 더 관심 갖고 기리자는 뜻도 담겼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했음에도 훗날 잘 밝혀지지 않았거나 관심 부족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면 후손의 게으름이라 생각한다. 혹 그런 일들이 있지 않나 주변부터 찾아볼 필요가 있다. 독립운동의 기점이 된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 속에서 보인 대전 충청권의 참여 열기는 어느 지역 못지않았다. 서울에서 비롯된 만세운동은 이틀 뒤인 3월 3일 충남 예산을 시작으로 4월 12일까지 한 달 이상 충청권 전역으로 확산됐다. 대전에서는 3월 16일 유성, 27일 인동, 28일 유천동, 29일 가수원, 31일 유성, 4월 1일에는 인동, 유성, 갈마동(만년교 주변) 세 군데서 만세운동이 있었다. 어느 경우 4월 3일까지 크고 작은 만세운동이 10회에서 19회 있었다고도 전한다.
아쉬운 것은 그에 따른 정확한 기록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나라와 민족 살리는 운동에 뛰어든 이들의 목숨 건 희생과 노력이 분명히 있었건만 구체적인 자료와 기록이 부족한 것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국 어디든 대개 장날을 기점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3월 27일 대전 인동장터에서도 수천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하였고 사상자도 꽤 있었다. 이는 4월 1일 있었던 천안 아우내장터보다 앞선 일이고, 참가 인원도 천안 아우내 못지않았음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나 평가가 미진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앞으로가 문제다. 여기서 역사 현장을 어떻게 보전하고 기릴까의 문제도 중요하다. 병천(아우내)의 경우 만세운동의 현장보다는 먹거리 순대국밥이 먼저 떠오를 정도로 뭔가가 바뀌어 있다. 표지판도 안내판도 없는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현장을 물어물어 찾아가면 순대국밥집만 즐비하다. 별도의 공간에 만세운동 기념공원을 세우기는 했지만, 만세운동 현장과는 다른 곳에 있다.
다행히 대전 인동장터 만세운동 현장에는 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행사를 열고 있다. 만세운동이 4월까지 이어졌으니 3월 초에만 반짝하는 행사 중심이기보다는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한다. 그래서 대전에서도 어느 지역 못지않은 독립만세운동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대내외에 알렸으면 한다.
/김덕균 한국효문화진흥원 효문화연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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