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생의 시네레터] 비극에 대한 무지의 죄를 깨우는 소희의 춤 '다음 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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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생의 시네레터] 비극에 대한 무지의 죄를 깨우는 소희의 춤 '다음 소희'

김대중(영화평론가/영화학박사)

  • 승인 2023-03-30 08:34
  • 정바름 기자정바름 기자
소희
찬 겨울 양말도 신지 않고 삼선슬리퍼 차림으로 저수지를 향해 가는 소희. 소녀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직 성인도 아닌 상태. 학생이지만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와 똑같은 수준의 일을 해야 하는 상황. 카메라는 언덕을 바라보고, 저수지는 언덕 너머 아래쪽에 있으므로 소희는 서서히 프레임 밑으로 사라져 갑니다. 프레임 안은 현실, 밖의 밑쪽은 죽음. 죽을 만큼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희가 간 곳은 현실 아래의 죽음입니다.

통신사 해지 방어가 월 100만 원 조금 넘는 돈을 벌기 위해 전화기 너머 보이지 않는 상대방의 온갖 폭력과 멸시를 견뎌야 하는 소희와 동료 실습생들의 일입니다. 재하청업체 위로 하청업체가 있고, 그 위로 본사가 있습니다.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아무 경험도 없고, 보호도 받지 못하며, 언제든 그만두게 할 수 있는 특성화 고등학교 실습생들이 맡고 있습니다. 신속하고 정확하며 편리한 소통을 위한 사회시스템의 최하부 일선에 선 그들은 정작 제대로 된 소통도 공감도 누리지 못한 채 죽음에 내몰렸습니다. 아이러니의 극치입니다.

영화는 자본 권력의 폭력과 비인간성을 마치 영국 감독 켄 로치의 작품들처럼 고발합니다. 2017년 벌어진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삼은 이 작품은 르포와도 같습니다. 작품 전반부 소희가 학생이었다가 유사 직장인인 실습생으로, 의무는 직장인처럼 져야 하고, 권리는 아직 학생이라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는 한심하고 비극적인 상황 끝에 극단의 선택을 하는 내용을 보여줍니다. 후반부는 형사계 경감인 유진이 소희의 관계자들(친구, 부모, 교사, 직장 동료, 상사들)을 찾아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언뜻 소희는 응당 피해자, 희생자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기도 한 '다음 소희'는 더 이상의 피해와 희생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전 소희가 저항하려 했고, 소통하려 했고, 공감하려 했던 모습은 유진이 소희의 관계자들을 만나 보여준 분노와 비판, 기억과 폭로 등이 '다음 소희'의 몫이라는 것을 일깨웁니다.



소희가 생전의 모든 것을 다 삭제하고 유일하게 남긴 휴대폰 속 영상. 그녀는 지하 연습실에서 춤을 추며 웃고 있습니다. 프레임 속에서 현실의 바닥을 딛고 뛰어오르는 그녀는 이제 실재가 아니라 부유하는 이미지로 남았습니다. 세상의 비극을 알지 못한 채 살아 있던 자의 죄의식을 아프게 일깨우면서 말입니다.

/ 김대중(영화평론가/영화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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