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선 교수 |
가슴에서 서른 해 데워진 감사하다는 말의 온도 때문이었던지, 회의장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홑겹의 옷을 걸쳤을 뿐인데도 온종일 따뜻하게 보냈다. 삼십 년 전에 혈기 왕성한 젊은 검사였을 변호사는 그제나 지금이나 결이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변호사의 삶이 그와 같지 않았더라면 정장의 신사가 공연한 자리에서 오래된 감사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었다. 고운 말의 반은 말을 하는 사람이 만들고, 나머지 말의 반은 말을 듣는 사람이 만든다는 이치를 또 배웠다.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가슴에 밭을 갈고 따뜻한 말의 뭉치들을 키우며 산다. 감사하다, 고맙다, 덕분이다, 그러자, 힘내라, 아자 아자. 같은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입으로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것에 성이 차지 않는 듯,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려 사람의 가슴에 못이 되는 말을 망치질한다. 개, 충, 뇬, 녀, 놈, 끼, 자, 리, 기, 딱, 바리, 발이, 어라, 져라.
욕이 아닌 말도 쓰임새가 잘못돼 미늘처럼 가슴에 박히고 평생에 걸쳐 사람의 마음을 곪게 만든다. "하의 상은 되겄다". 딸에게 한 말이었다. 아홉 명 중 일곱째 등수가 '하의 상'이었다. 꼭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슴에 대못이 될 뻔한 아버지의 말에 딸은 상처받지 않았다고 썼으나, 사람 살이에 아주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쳤다는 어떤 느낌이었노라고 적었다. "잘못 봤겄제". 사회주의자이며 유물론자인 혁명가 아버지는 혈육의 동생에게도 '무심히 비수'를 던졌다. '처벅'이라고 신문에 인쇄된 미국 사람의 이름을 '퍼벅'이라고 잘못 읽었을 뿐인 동생은 마을 사람들이 모인 공연한 곳에서 혁명가 형에게 면박당했다. 처벅이든 퍼벅이든 펄벅이든 빙그레 웃고 넘어가더라도 될 일이었다. 집으로 달려간 동생은 그날 밤 됫병의 소주를 마셨고, 반백 년을 형과 서먹서먹하게 살았다.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그려진 삽화다. 소설은 삶의 모든 순간이 파편처럼 예제 흩어져 있다가 부음을 듣고 마치 '헤쳐 모여'라는 구령을 들은 듯 모여들어 그 사람의 거대하고 뚜렷한 존재를 우뚝하게 드러내는, 그 사람의 생전의 말의 역사이기도 한 장례식장의 풍경을 그렸다.
얼마 전 대법원은 유명한 여성 연예인을 '국민 호텔녀'라고 공격한 것은 모욕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선고했다. 항소심은 온라인 뉴스 댓글에서 그런 정도의 표현은 용인될 수 있다고 보았으나 대법원은 표현의 자유 범위를 벗어났다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나아가 대법원은 성별이나 출신 지역, 인종 등을 이유로 난무하는 혐오 표현 중에는 모욕죄로 처벌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며 그러한 경우 모욕죄가 혐오 표현을 규제하는 데 쓰임새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대법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헌법재판소 역시 이미 2020년 12월, 똑같은 말을 했다. 혐오 표현을 직접 형사 처벌하는 법률 조항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나라 상황에서, 혐오 표현으로부터 사람들의 인격을 보호하는 데 모욕죄가 기능한다고 보았다.
언론 보도가 말의 망치질에 합류하고 심지어 앞장서는 경우가 많다. 시민을 진영으로 나누고 상대편에게 비수를 꽂으려는 못된 정치인들의 혐오스럽고 거친 말을, 날것 그대로 가져와 따옴표 처리해 보도한 사례들이 그 예다. 인용될 것을 염두에 두고 글로 쓴 유명한 사람들의 소셜미디어 메시지를 거르지 않고 그대로 옮겨와 혐오스럽게 재생산하는 언론 보도 역시 문제다. 언론의 언어는 더 정제되어야 한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