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셋째 주 주말, 귀농귀촌한 지인에게서 지방 구석에 이런 곳도 있다며 소개를 받고 경북 군위에 있는 사설 수목원인 사유원(思惟園)을 방문했다.
텅 빈 상태를 뜻하는 치허문(致虛門) 입구 안쪽에 주차를 하고, 안내 데스크에게 GPS 위치추적기를 선물(?)받았다. 뭐냐고 되물었다. 직원은 농담조로 무사히 돌아오시길 기원하는 선물이라며 나가실 때 반납하라며 생수도 한 병 챙겨주었다. 가끔 퇴장시간까지 돌아오지 않는 분들이 있어서 꼭 목에 차고 있어달란다. 10만평에 가까운 식물원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조난까지 당할까 싶었다.
좀 가파르다 싶은 비나리길을 걸어 오른쪽으로 꺾으면 치하루길로 접어든다. 울창한 리기다소나무숲길을 따라 가다 소요헌을 만났다. '자유롭게 거닐며 다니는 집'이란 뜻의 소요헌은 장자의 소요유에서 이름을 가져왔다고 한다. 긴 상자각 같은 구조물 두 개를 좁은 V 형태로 연결했을 뿐 어떤 기능도, 장식도 없었다. 다만 이 공간에 대한 에피소드만큼은 유명했다. '건축의 시인'이라 불리는 포르투갈 출신 세계적 건축가인 알바로 시자의 건축 예술품이다. 원래 스페인 마드리드 현상공모에 설계가 당선되어 피카소 뮤지엄으로 지어질 예정이었다. 거기에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스페인 게르니카 지역의 대학살을 그린 작품-가 전시될 예정이었으나 작품 유치가 어려워 계획이 전면 취소되었다. 사유원의 설립자인 대구 태창철강의 유재성 회장이 각고의 노력 끝에 이곳에 건물을 유치하고, 마치 게르니카 비극 내지 그림을 연상케 하는 철골 조각품을 건물 천장을 뚫어 매달아 놓았다. 나는 햇빛이 파고드는 밑바닥에서 조각품을 올려다보았다. 주변에 관광객도 없어 나는 유튜브에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찾아 볼륨을 높였다. 건물 내벽을 타고 스테레오 음향으로 사유의 깊이가 횡적으로 퍼져나갔다. 종횡으로 퍼져가는 사유의 깊이를 가늠하며 한참을 거닐었다. 이 게르니카 장식품의 뒤쪽 방엔 전망대와 함께 대리석의 새알이 조각되어 있다. 비극과 재탄생의 양면성이라고 해야 할까.
소유헌을 나와 더 위쪽으로 발길을 향하면 풍설기천년이 나온다. '바람, 눈, 비를 맞으며 어언 천년'이란 뜻으로 오랜 풍상을 이겨낸 수령 300년 이상 된 모과나무 108그루를 모아놓은 정원이다. 설립자 유 회장이 일본으로 밀반출될 위기의 모과나무 4그루를 웃돈을 주고 사들인 것이 계기가 되어 그동안 모은 모과나무를 심을 곳을 찾다 이곳에 사유원을 지었다고 한다. 한학자이기도 한 유 회장이 지은 이름 하나하나가 공간에 대한 사유의 깊이를 더했다. 그 옆에 별유동원-인간세상이 아닌 무릉도원-은 수령 200년 이상의 백일홍 나무(배롱나무)가 모여 있다. 초여름 백일홍이 피면 이 일대가 장관이 된다고 한다. 여름을 당겨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미리내길 언덕을 넘어가 느티나무 숲길인 한휴시경과 사담 레스토랑, 유담이란 한옥 정원을 거쳐 정상부근인 가가빈빈(브런치 카페)까지, 산책길을 걸어 올라가면서 다양한 수목을 만났다. 개나리와 진달래꽃은 지천에 널려있고, 특히 겨울에 핀다는 매화꽃은 이미 진줄 알았는데 길목마다 그 붉은 탐스러움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능수 벚꽃이 만개해 꽃잎을 늘어뜨리고, 흰 목련과 붉은 목련이 나란히 만개해 있었다. 그 어디에서 이런 3월의 꽃들을 한자리에서 볼까 싶었다. 정말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무릉도원 같은 사유원 산책 숲길에서 단 하나의 3월의 정원을 만났다. 이곳을 식물원이라고 명하기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승효상 건축가의 건축물부터 알바로 시자의 건축 작품까지 건축물을 연결하는 숲길에 조성된 정원은 그저 둘러보는 곳이 아니라 머물며 사유하는 신개념의 정원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왜 퇴장시간까지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지방소멸을 말하는 요즘, 군위에 이런 사유의 민간정원이 세워졌다는 사실에 놀라고, 소멸을 말하기에 앞서 새로움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지방의 자세에 대해 사유가 깊어졌다.
김재석 소설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