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 : 移(옮길 이) 木(나무 목) 之(어조사 지) 信(믿을 신)
출 전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상군열전(商君列傳)
비 유 : 남을 속이지 않거나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
법(法)이란 글자는 본래 水+薦+去가 발전되어 현재에는 水+去(法)으로 만들어졌다.
어원을 보면 薦은 신령스런 동물로서 이 짐승이 닿으면 금방 그 사람에게 죄가 있고 없음을 판별할 수 있다. 이어 水는 물과 같이 공평하게 죄를 조사[薦]하여 바르지 아니한 자를 제거[去]한다는 뜻이다. (東亞 漢韓中辭典 東亞出版社, 1986년)
불교에서는 인간행위의 의지처로서 법을 세우기도 한다. 석가모니의 최후 설법 가운데 "자기에게 의지하라. 법에 의지하라. 자기를 등불로 삼아라. 법을 등불로 삼아라"라는 말씀이 있다. 즉 인간이 자신의 이법(理法)을 실천하는 곳에 참다운 자기가 구현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법은 약자를 보호하는데 사용해야지 권력, 재력의 도구로 쓰이면 폐단이 많다.
진(秦)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할 정도로 강성해진 것은 상앙(商?)덕분이었다.
상앙의 본명은 공손앙(公孫?)으로, 위(魏)나라 재상인 공숙좌(公叔?)를 섬겼다. 공숙좌가 병이 나자 위혜왕(魏惠王)이 친히 문병을 와서 공숙좌 후임에 대해 물었다.
이에 공숙좌는 "공손앙은 비록 서인이지만 현명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공손앙을 자기 후임으로 강력히 추천합니다. 만약 쓰지 않으려면 죽여 버리십시오"라고 진언했다.
위혜왕은 공숙좌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이 돌아간 뒤 공숙좌는 공손앙에게 사실(공손앙을 죽이라는 말)을 말해 주며 도망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공손앙은 왕이 자신을 쓰라는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자신을 죽이라는 진언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도망하지 않았다.
멀지 않아 공숙좌가 죽은 뒤, 마침 이웃의 강대국인 진(秦)나라의 효공(孝公)이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영을 내렸다. 이 말을 듣고 공손앙은 진나라로 가 효공에게 유세(遊說)를 했다. 4차까지 계속된 공손앙의 유세를 들은 효공은 그를 등용하고, 그의 계책을 받아들여 변법(變法)을 단행하려고 법령을 제정했다. 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민가는 5호 혹은 10호를 한 조로 묶어 서로 잘못을 감시하도록 하고, 한 집이 죄를 지으면 10집이 똑같이 벌을 받는다.
2. 죄지은 것을 알리지 않는 사람은 허리를 자르는 벌로 다스리고, 그것을 알린 사람에게는 적의 머리를 벤 것과 같은 상을 주며, 죄를 숨기는 사람은 적에게 항복한 사람과 똑같은 벌을 준다.
3. 백성들 가운데 한 집에 성년 남자가 2명이상 살면서 분가하지 않으면 부역과 납세를 2배로 한다.
4.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은 각각 그 공의 크고 작음에 따라 벼슬을 올려 주고, 사사로이 싸움을 일삼는 자는 각각 그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벌을 준다.
5. 본업에 힘써 밭을 갈고 길쌈을 하여 곡식이나 비단을 많이 바치는 사람에게는 부역과 부세를 면제해 준다.
6. 상공업에 종사하여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와, 게을러서 가난한 자는 모두 체포하여 관청의 노비로 쓴다.
7. 군주의 친척이라도 싸워 공을 세우지 못했으면 심사를 거쳐 공족으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 없게 한다. 공을 세운 사람은 명예를 누리지만, 공을 세우지 못한 사람은 부유해도 화려한 생활이 허락되지 않는다." (강력한 신상필벌 적용)
그러나 공손앙은 백성들이 새로운 법을 신임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법을 공표하기 전에 국가가 백성들에게 신임(믿음)을 먼저 보여 주는 행동을 했다.
이에 높이가 세 발 되는 나무를 남문에 세우고 이를 북문에 옮겨 놓는 사람에게 10금을 상으로 준다고 공시했다. 하지만 모두들 이상히 여기기만 할 뿐 아무도 옮기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상금을 50금으로 올려 공시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옮기자 약속대로 50금을 주었다. 이처럼 나라가 백성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 알린 다음, 마침내 법령을 공표하였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불평을 하였지만, 법이 시행되고 10년이 지나자 길가에 물건이 떨어져도 줍는 사람이 없었고, 도둑도 없어졌으며, 집집마다 모두 생활이 넉넉해졌고, 백성들은 전쟁에는 용감하였으나 개인의 싸움에는 힘을 쓰지 않았고, 나라는 잘 다스려졌다. 공손앙은 법 앞에 성역이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법을 시행했다. 심지어는 태자가 법을 어기자 태자 대신 태자의 스승인 공자 건(虔)을 처벌하고, 또 다른 태자의 스승인 공손가(公孫賈)를 자자형(刺字刑, 이마에 문신을 새겨 죄명을 찍어 넣는 형벌)에 처할 정도였다. 공자 건은 4년 후 또 범법을 하여 의형(?刑, 코를 베는 형벌)에 처해져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강력한 법집행 실천)
진나라는 공손앙의 변법을 통해 전국시대 가장 막강한 나라가 되었다. 공손앙은 또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굴복시켰다. 하지만 효공이 죽고 태자가 왕으로 즉위하자 공손앙은 평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공자 건의 무리들에 의해 모반죄로 몰려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거열형이란 환형(?刑)이라고도 하는데, 수형자의 두 팔과 다리 수레에 매달아 동시에 수레 4대를 달리게 하여 신체를 찢어 죽이는 형벌을 말한다.
인간사에 법(法)은 존중(尊重)되어야 하며, 지공무사(至公無私)되어야 한다.
특히 법을 만드는 기관은 준엄해야 한다. 자기 권력이나 개인의 실익을 위해 만들어져서는 더더욱 안 되는 일이다. 오직 국민(國民)과 국익(國益)을 위해 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독재자들은 작법자폐(作法自斃)나 자승자박(自繩自縛)의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사심에 의해 법을 제정하고 집행함에 따른 하늘의 심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장상현/인문학 교수
장상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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