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광 소장 |
그런데, 돌이켜 보면 나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배운 얄팍한 지식을 장착하고는 테스트가 완료된 완성품인 양 평생을 우려먹고 살아온 것 같다. 전자제품은 출시된 이후에도 필드 테스트를 통해 끊임없이 소비자의 불편을 해소하는데, '나'라는 제품은 고객의 불편함을 반영해 업그레이드할 새도 없이 미완성품으로 쉼 없이 일을 처리해왔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세계적인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그의 저서 '늦어서 고마워'에서 "기술, 세계화, 기후변화가 한꺼번에 가속화 하고 있는 '가속의 시대'에 적응해야 하는 우리는 누구나 낙오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 있다."고 하였다. 프리드먼은 급속한 변화가 절망감을 줄 수 있지만 겁먹거나 후퇴하지 말고 의식적으로 잠시 멈춰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생각할 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그는 어느 날 약속 장소에 늦게 나타난 친구에게 "늦어서 고마워"라고 말했는데, 친구가 ‘늦은 덕분에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잠시나마 숙고할 시간을 갖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뜻이었다.
이젠 나도 친구가 약속 시간에 늦으면 오히려 고마워할 만큼 여유가 생겼다. 퇴직 후 그동안 관심이 없었던 역사와 경제, 인문학 분야를 탐구해가면서 내가 알았던 세상이 얼마나 좁았었는지를 새삼 느꼈다. 비로소 '나'라는 제품을 85퍼센트쯤 개발된 베타 테스트 상태로 두고 꾸준히 개조해나가는 법도 깨우치게 되었다.
그런데, 나를 조금씩 개선해 갈수록 '나'라는 제품의 미래 수요자는 누구일까, 과연 있기는 하겠느냐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스타트업의 제품은 아이디어와 역량과 수요가 만나야만 시장에서 기회가 생긴다는데, 아이디어와 역량만 있고 수요가 없으면 아무도 원하지 않는 제품이 될 수 있다. 살아온 짬밥으로 태풍 가장자리에서 헤매는 것보다는 태풍의 한가운데서 춤을 추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나를 필요로 했던 그 옛날 비바람 현장이 오히려 그립다.
프리드먼은 지금 같은 숨 가쁜 변화의 시기에는 변화만큼 빠른 속도로 노를 저어 기술과 시장, 환경 변화의 속도를 따라갈 수 있도록 적응력을 높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헤엄을 잘 치는 말은 급류에 빠졌을 때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려다가 힘이 빠져 죽고 마는데, 소는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다 조금씩 강가에 가까워져 산다는 '우생마사'(牛生馬死)의 교훈을 얘기한다. 빠르게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리를 따르는 것이 더 의미 있다는 가르침이다.
어찌 보면 지금은 우연히 늦어서 고마운 친구를 기다리기보다는 일부러 멈춰서 나를 둘러싼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불확실한 미래에 조바심을 내 허우적거리기보다는 '나'라는 제품이 과연 어디에 쓰일 수 있을까 냉철하게 생각하는 것이 우선이다. 흘러가는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고 불안해하며 거슬러 오르기보다는 급류에 몸을 맡기고 언젠가 도달할 강기슭을 기다리는 것이 순리이다. 흘러가는 동안 지식을 얄팍하게 덧대는 것보다는 차라리 겹겹이 쌓인 고루함을 디가우징하여 유연성을 회복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마침내 도착한 강기슭에서 운이 좋으면 겨울이 시작되기 직전 반짝 날씨가 좋아지는 '인디언 썸머'를 맞을 수도 있지만, 황량한 겨울로 바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쫄지 마! 나는 잡초잖아. 무너져 내린 언덕 토양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비바람을 견뎌내고 있다 보면 겨우내 흙먼지가 뿌리 사이에 들어차고 땅이 단단해져서 다음에 도착하는 이들의 발판이 될 수 있겠지. '나'의 존재 이유는 그것으로 족하다.
/양성광 혁신과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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