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쓴지 꽤 오래 되지만, 여전히 잘 쓰지 못한다. 늘 아쉬울 뿐 흡족한 적이 없다. 부족한 것을 왜 세상에 내보일까? 남에게 보이지 않으면 작품,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벽한 다음 가르친다면 그 누가 선생이 되랴? 부족한줄 모르는 것은 죄가 되지만, 부족한 줄 알면서 발표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자위해 본다.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다보면 글이 더 꼬인다. 방법도 방법이지만 내용도 마찬가지다. 신선하지 않으면 맛이 덜하다. 수려하진 않더라도 매끄러워야 한다. 적절한 구성과 전개로 감동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과장되면 곤란하다. 사실, 진실 여부도 점검해야 한다. 토씨 하나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수 없이 고치다 보면 본질이 사라질 수 있다. 논리 구조가 무너지기도 한다. 수차례 살펴도 오류 및 오탈자가 나온다. 본인이 옳다고 썼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시각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숙명일까? 출판사에서 보고, 또 보고 인쇄에 들어가도 여지없이 오탈자가 나타난다. 아무리 많이 수정해도 다함이 없는 것이다.
바로 글짓기에서 퇴고(推敲)라 하는 것이다. 퇴고는 작성한 시문을 다시 읽어가며 다듬어 고치는 것이다. '推'는 우리말 독음에서 '추'로 더 많이 쓰여 추고로 읽기도 한다. 다만, 이때에는 '퇴고'가 표준어로 정해져있기 때문에 '퇴'로 읽어야 한다.
김홍도 '월하고문', 종이에 연한채색, 27.4×23cm, 간송미술관 |
깊은 숲속으로 인도하려는 것일까? 가지 무성한 나무를 근경에 배치하였다. 그 뒤로 목책울타리가 늘어서 있다. 밤안개 자욱한 달빛 아래, 한 스님이 울타리 모서리에 있는 사립문을 두드린다. 왼편에 화제가 쓰여 있다. "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새는 연못가 나무에 깃들이고 중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린다)" 화제로 보아 안개 속 어딘가 연못이 있는 모양이다.
이 화제는 가도의 시 <제이응유거(題李凝幽居, 이응의 그윽한 거처를 쓰다)>에서 인용한 것으로 퇴고를 설명하기 위한 그림이다. 당시에도 연상기억법을 알았던 모양이다. 퇴고의 자구는 밀고 두드린다는 의미다. 자구 자체에는 고친다는 의미가 없다. 아는 바와 같이 고사성어는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드물다. 고사를 알아야 한다. 여러 자료를 참고하면, 고사의 내용은 이렇다.
중국에 가도(賈島, 779∼843)라는 중이 있었다. 과거 보러 가던 길에 하루는 나귀 등에서 위에 언급한 '새는 연못가 나무에 깃들이고 중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린다.'라는 시구가 떠올랐다. '퇴(推)' 자를 쓸까 '고(敲)' 자를 쓸까, 결정을 못 하고 손짓으로 밀거나(推) 두드리는(敲) 동작을 했다. 때마침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부현지사(副縣知事) 한유(韓愈, 768~824)의 행차가 지나는데, 그와 마주쳤다. 시구에 열중하다보니 가도는 그것도 알아채지 못하였다. 좌우 사람에게 붙들려간 가도가 한유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자, 한유 역시 한 동안 생각하다 '敲' 자가 좋겠다고 말해 주었다. 이후 한유의 권유로 가도는 환속하여 시인으로 살았으며, 함께 시를 논하는 둘도 없는 시우(詩友)가 되었다.
내친김에 시도 감상해보자. 김성일(金聖日)저 <고사성어대사전>에서 옮겼다.
한가롭게 사니 함께하는 이웃도 드물고(閑居少?竝)풀숲 오솔길은 황폐한 뜨락까지 통한다(草徑入荒園)새는 연못가 나무에 깃들이고(鳥宿池邊樹)중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린다(僧敲月下門)다리를 건너니 들판의 색깔도 나뉘고(過橋分野色)돌을 옮기니 구름의 뿌리가 움직인다(移石動雲根)잠시 떠났다가 다시 이곳에 돌아오니(暫去還來此)그윽한 기약 말을 어기지나 말았으면(幽期不負言)
퇴고는 성찰이다. 재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성찰이다. 자기성찰 능력은 모든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예술뿐이 아니다. 자기성찰능력이 일의 성패를 좌우한다. 성찰이 없는 사회는 진보가 없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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