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민주의거 첫 계승세대인 배재대 이영조 교수가 민주의거와 대전시민정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7일 대전 배재대학교 아펜젤러관 연구실에서 기자를 맞이한 이영조(63) 교수는 1960년 3월 대전 학생들이 "학원의 자유화"를 외칠 때 참여하거나 목격한 세대가 아니다. 오히려 대전 3·8민주의거를 훗날 뒤늦게 접하고 그날의 민주정신의 가치를 발견한 첫 번째 계승 세대다. 1960년 당시는 여당을 찬양하는 정부신문을 학급비로 강제구독하고 수업시간에는 대통령의 미국망명시절 연설을 들어야 했으며 학교 밖에선 고무신과 막걸리, 돈 봉투가 춤추는 부정선거가 절정이던 시기였다. 그해 3월 8일부터 10일까지 대전 시내 7개 학교 학생 2000여 명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독재정권의 부정부패에 항거하고 학원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대전 3·8민주의거는 대구2·28민주운동과 마산 3·15의거를 거쳐 대통령의 하야를 촉발한 4·19혁명까지 이어진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한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이영조 교수가 3·8민주의거를 접한 것은 당시 참여자들의 경험과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1차 구술기록화 작업이 시작된 2010년이었다.
이 교수는 "3·8의거 참여자들을 찾아가 인터뷰할 때 누군가 만들어준 질문지를 가지고 진행했을 정도로 전에 접하지 못하던 사안이었다"라며 "개인적으로 연구해서 학술심포지엄에 토론자 발표자로 참여하고 논문을 쓰면서 3·8민주의거 의미를 알게 돼 지금까지 계승사업을 함께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전 학생들이 결의문도 미리 작성하고 여러 학교가 연대했을 정도로 치밀하게 계획한 최초의 대규모 민주화운동이었다는 데에 의미를 뒀다.
이 교수는 "4·19혁명사에서 3·8민주의거는 사전 계획에 의한 전국 최초의 대규모 학생 시위이자, 지방에서 시작해 서울로 이어지는 혁명의 중요한 징검다리였다"라며 "일반적인 시위와 다른 것은, 당시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배운 최초의 세대로서 자기 희생을 감수하고 기성세대를 대신해 용기 있게 실천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3·8민주의거 계승 세대로써 연구를 거듭해 몇 가지 사실관계를 규명했다. 2019년 2차 구술기록화 작업을 통해 당시 학생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뛰쳐나가 경찰에 가로막혀 흩어지고 다시 뭉친 의거의 길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또 학교 측이 교문을 가로막거나 기말고사를 앞당겨 직접 학교 밖으로 뛰쳐나오지는 못했으나 교실 책상을 두드리며 학원 자유화를 요구한 교내에서의 저항도 기록화 작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교수는 3·8민주의거를 평가할 때 시민들의 호응이 있었음을 빠트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경찰이 참여자 색출을 위해 뿌린 액체 형태의 콜타르가 묻은 학생에게는 자신의 바지를 벗어준 시민 그리고 봄 농사철을 앞두고 오물통에 빠진 학생에게는 씻을 수 있도록 앞마당의 샘을 내어준 시민들의 용기가 혁명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
이 교수는 "3·8 참여세대는 이제 80대 중반에 접어들어 고령화되고 세상을 등지는 이들도 적지 않아 그때 민주화정신을 이어받아 시민에게 전수하는 계승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라며 "수면 아래에 있던 의거를 혁명을 촉발한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도록 한 참여세대 노력을 인정하고, 우리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 모두의 기억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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