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양목 선생의 묘소가 있는 미국 스탁턴의 파크뷰 공동묘지의 애국지사 문 선생의 비석 모습. 문양목 선생의 유해 국내봉환이 추진 중이다.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
▲동학운동 이어 미주 항일운동 개척
문양목(1869~1940)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서산 동학 북접조직에 가담해 관군에 감금된 동학의 부두목 30여 명을 탈출시키는 작전에 참여했다.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동학혁명군은 퇴폐를 맞았고, 선생은 경기도 인천으로 피신한 뒤 서당교사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그러던 중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한국이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2년간 노동자로 종사한 선생은 1906년 미국 본토인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본격적인 미주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07년 재미 한국인들의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보국회를 결성해 중앙회장에 선임되고, 국내외 동포들을 대상으로 국권회복 의식을 계몽하는 소식지 '대동공보' 발행인을 맡았다.
특히,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고문인 스티븐스(Stevens, D.W.)이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신문 지상을 통해 발표했을 때 대동보국회와 또 다른 한인단체 공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대응방안을 강구했다. 선생과 최정익, 정재관, 이학현 등 4인이 스티븐스가 투숙한 호텔을 찾아가 관련 기사의 정정과 해명을 요구했고, 이에 응하지 않은 스티븐스을 이튿날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권총으로 처단하는 의거가 일어났다. 문양목 선생이 기획하고 후원한 스티븐슨 처단 사건은 의열투쟁이 독립전쟁의 일환이라는 인식을 갖는 계기가 되었고, 정명운·장인환 의사를 돕는 재판 후원운동으로 이어졌다. 정부는 선생의 이 같은 미국 내 항일운동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기념사업회 최재학 초대이사장 |
문양목 선생이 독립장 서훈을 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1995년 당시 고향인 태안과 서산지역에서는 문양목 선생에 대해 주목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태안군 남면 몽산리에서 충선공 문익점의 18세손으로 출생했으나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던 때 기록이 워낙 드물고, 동학농민혁명군이 퇴폐하면서 34세 나이에 인천으로 피신했기 때문이다.
최재학 문양목 선생 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은 "저도 태안에서 태어나 1998년 지역뉴스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된 문양목 선생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으나 문중 어르신 몇 분만이 선생의 업적을 알고 계실 정도로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상황"이라며 "문중 어르신을 찾아다니며 구전을 수집해 동학 역사를 통해 확인하고 서울 중앙도서관을 찾아가 미국에서 발행된 '대동공보' 등을 일독하며 선생의 업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문양목 선생이 태안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서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이종일(1858~1925) 선생과 함께 선양될 충분한 업적은 오히려 서민의 삶에서 독립운동 지도자 역할을 오랫동안 실천했다는 데에서 찾아진다.
최 초대이사장은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대부분 유학파이었으나 문양목 선생은 하와이 사탕수수밭 근로자에서 시작해 대한인국민회 회장에 오르며 적빈한 생활 속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이라며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망명한 후 한 번도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서거했으나, 세계 동포들을 계몽하는 '대동공보' 신문이 태안까지 발송돼 문중 어르신들이 보았다는 구전이 있을 정도로 교류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최 초대이사장은 2007년 문양목선생의 생애를 책으로 처음 발간하고 지난 10년 간의 연구를 집대성해 2015년에 문양목평전을 발행해 체계화했다. 또 2005년 선생 추모사업회를 설립함으로써 태안지역 독립유공자 선양사업의 길을 놓았다.
▲후손을 찾아 태평양 건너 인터뷰
태안이 낳은 애국지사 문양목 선생을 선양하는 사업은 그의 생가지를 복원하는 정책으로 이어져 2015년 생가지 복원 및 기념관 건립이 추진됐으나, 지자체에서 관련 예산이 최종 부결되면서 제동이 걸린바 있다. 전시할 유물이 확보되지 않았고, 생가지라고 여길 수 있는 흔적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지역사회에서 문양목 선생을 재조명하는 여론이 일었고, 태안신문이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찾아 선생의 후손을 만나 국내에 소개함으로써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선생의 셋째 아들 윌리엄 문 옹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고, 그동안 파악되지 않았던 문양목 선생의 미국 내 활약에 대한 자료를 추가로 수집했다. 선생의 후손은 아버지가 서거한 후에도 태안에 있는 문중 관계자에게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보내 인연을 놓지 않았던 것이 확인됐고, 맨티카에서 무사탕종사를 경영하는 한편, 스탁톤 여관을 구매해 한인들에게 노동주선과 숙소를 제공하기도 했다. 2020년 타계한 선생의 셋째 아들 윌리엄 문 옹은 당시 취재진에 "아버지와 추억이 많지 않다"고 설명하면서 '동학운동'과 '독립운동'이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정확히 표현할 정도로 익숙하게 들었던 단어라고 밝혔다. 문양목 선생은 1909년께 박용만(1881~1928·건국훈장 대통령장)이 네브라스카주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자 항일무장투쟁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미재 소년병학교'라는 글을 써서 학생들을 권유 ·입교하도록 했다. 이 소년병학교는 한국 최초의 독립군사관학교였다. 이밖에 3·1운동의 계기가 되는 파리평화회의 청원대표 파견과 뉴욕에서 열리는 '약소국동맹회의'에 대표 파견 결정에 참여하고, 3·1운동이 일어나자 멘티카 지방에서 국어학교를 개설해 한인 아동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태안신문 김동이 기자는 "선생의 후손이 문중에 매년 기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 찾아가 만나야겠다고 취재계획을 세우게 됐다"라며 "유족을 국내에 처음 소개해 문양목 선생의 선 양활동을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어 지금은 봉환까지 앞두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라고 밝혔다.
이수연 문양목선생기념사업회 선임이사(전 태안 부군수)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국인연합감리교회에서 도산 안창호와 이대위 목사 등 미주 항일운동의 역사를 조사하고 있다. (사진=문양목선생추모사업회 제공) |
문양목 선생은 1940년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스탁턴의 파크뷰 공동묘지에서 영면에 들었다. 하와이 노동자로 이주한 이후 국내에 한 번도 입국하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숨진 문양목 선생을 국내에 봉환해 국립묘지에 모시기에 앞서 필요한 것은 후손의 공감과 동의였다. 앞서 2005년 이대위(1878~1928·건국훈장 독립장) 선생의 유해가 국내에 봉환될 때 함께 모시려는 정부의 계획도 있었으나 이때도 후손 일부가 동의하지 않아 이뤄지지 못했다. 부모의 유해를 후손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고국으로 보내는 결정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이때 나선 이가 이수연 문양목선생기념사업회 선임이사(전 태안 부군수)다. 이 상임이사는 캘리포니아와 와이오밍, 뉴멕스코 등 흩어진 후손들을 일일이 찾아가 설명하고 유해의 대한민국 봉환 필요성을 설득했다. 최근에 후손을 대표하는 손자로부터 유해의 봉환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맺음으로써 봉환에는 차질 없이 이뤄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이를 바탕으로 국가보훈처가 지난해 12월 미국 현지실사를 통해 봉환 가능성을 타진하고 윤석열 대통령에게 새해 업무계획으로 문양목 선생 봉환 계획을 보고할 수 있었다.
애국지사 문양목 선생 |
선생의 봉환에 앞서 국내에서는 과제도 남았다. 태안군에 생가지 복원을 위한 절차가 아직 이행되지 않고 있다. 또 문양목 선생의 업적에 대한 연구도 완결된 것이 아니다. 스티븐슨 처단 사건에서 선생이 지원하는 역할을 너머 현장에 있었을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고 있어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또 샌프란시스코 한국인연합감리교회가 주축이 되어 해외 독립운동사의 일부분이 확인되었다는 점도 앞으로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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