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화요일엔 늑장부리다 지각할 것 같아 조반을 먹는 둥 마는 둥 발걸음을 재촉하여 312번 버스를 탔다. 승차했을 때 시간이 오전 8시 5분이었는데 배재대 학생들 등교 시간과 맞물린 시간대였는지 빈 좌석이 하나도 없었다.
버스 안이 그리 붐비진 않았지만 서 있는 사람은 좀 있는 편이었다. 학생들 시험 기간인지 중간 중간에 공책을 펴들고 서서 공부하는 학생도 있었고, 개중에는 좌석에 앉아 유인물을 암기하느라 골몰하는 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312번 버스 지나는 노선 옆에는 배재대밖에 없기에 아마도 배재대 학생들일 것으로 추측이 됐다.
생뚱맞은 생각이었지만 나도 학생 시절 그런 억척을 떨며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던지 골동품 추억까지 동원되어 흐뭇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승차하고 3분 정도 됐을 때 좌석에 앉아서 공책을 펴들고 공부하던 여학생 하나가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었다. 귀밑에 해 묵은 서리를 하고 있는 사람이 흔들리는 차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붙잡은 모양새가 안타까워 보였나 보다.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과 학생들은 무감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이 여학생은 가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앉아 있는 자리도 아니고, 시험 공부하다가 일어난 자리였기에 많이 미안했다. 나는 괜찮다며 감사함으로 예를 표하고 자리를 사양했다. 허나 여대생은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으로 극구 사양하며 일어난 자리를 도로 앉으려 하지 않았다.
30여 초 동안 옥신각신 팔자에도 없는 선전(善戰)을 하다 결과는 내가 백기를 들었다. 진심 어린 천사의 마음을 꺾을 수 없어 호의를 받아드리게 된 것이었다.
귀감이 되는 선행 천사의 대접을 받아서인지 그냥 자리에 앉기엔 좀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자리 값을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마디 건넸다.
"예쁜 얼굴에 마음까지 천사, 오늘 시험도 장원 점수일 거요."
순간 여대생은 환한 얼굴에 미소가 번지며 좋아하는 표정을 감추질 못했다.
아마도 칭찬 한 마디가 영약 중의 특효약으로 기분을 좋게 만든 것 같았다.
나는 상대방의 배려하는 아름다운 행동으로 흐뭇해하는 선물을 받았고, 상대방 여대생도 칭찬 한 마디로 엔도르핀이 생겼으니 이게 일석이조(一石二鳥)가 아니고 무엇이랴. 상생(相生)이란 특별한 게 아니라 바로 이런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대생이 고마웠다. 현대를 사는 아가씨이지만 선인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아가씨라서 더더욱 우러러 보였다. 여대생 아가씨는 바로 조선 시대 정철의 훈민가를 떠오르게 하고 있었다.
훈민가 / 정철
이고 진 뎌 늘그니 짐 프러 나랄 주오.
나난 졈엇꺼니 돌히라 므거올까.
늘거도 설웨라커든 지믈 조차 지실까.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인들 무거울까 !
늙는 것도 서러운데 짐까지 지는 것일까.- 노인 공경)
현대인으로서 선인들의 교훈에 따라 살려 하는 아가씨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얼굴도 예쁜 데다 마음까지 장원 감 천사였으니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쁜 얼굴에 마음까지 천사'
돈을 주고서라도 기림의 대상을 사다가 칭찬을 아낌없이 주고 싶은 여대생이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아가씨였지만 내가 아들 하나만 더 있어도 며느리를 삼고 싶은 욕심까지 생기는 아가씨였다.
시대가 바뀌고 변한다 하더라도 지구가 다하는 날까지 변치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건 바로 다름 아닌 인륜 도덕이며, 언제나 가슴 따듯하게 사는 인간성이다.
문명 발달로 편리한 세상이 된다 해도, 쉽고 편리한 것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제아무리 산업화 시대라도 기계만 중시하는 물질만능주의로 흘러서는 안 된다.
편리하고 살기 좋은 문명 시대,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온다 해도 인간성만은 상실해서는 안 된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배려하고 따듯한 가슴으로 보듬어 주는 그런 마음만은 변하거나 소멸돼서는 아니 된다.
힘들고 어려울 때 밀어 주고 끌어 주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함께 웃으며 살아야 한다.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며 동고동락하는 마음으로 너와 내가 하나 되어 우리로 살아야 한다.
용광로 가슴이, 마음이, 따로 있나 !
약자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사는, 바로 그게 용광로 가슴이지.
아가씨의 배려하는 마음이 하도 고마워 그녀가 내리는 모습까지 살펴보았다.
마음씨가 아름다운 아가씨라 그런지 뒷모습까지 그리 예쁠 수가 없었다.
그 날 따라 효문화지도사의 출근 발길이 왜 그리 가벼워졌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아가씨가 뿌려준 향 내음이 짙어서일 것이다.
예쁜 얼굴에 마음까지 천사인, 지상의 또 다른 천사에게 감사를 드린다.
남상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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