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단어를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운다. 짧지 않은 세월을 신문 편집기자로 살고 있다. 매일 수많은 기사를 읽고 그 뉴스 가치에 따라 레이아웃을 잡고, 또 제목을 달아 종이신문에 담아낸다. 그중에서 제일 어려운 과정은 제한된 글자 수로 각 기사마다 꼭 맞는 제목을 달아주는 일. 글의 내용을 잘 담아냈는지, 너무 상투적이지는 않은지, 단어 선택이 적절했는지 뜯어보고 또 곱씹어 본다. 그래도 남는 후회들. 정답이 없어서일까? 기사에 거명된 직접 당사자나 이해 관계자부터 글을 쓴 기자, 기사를 읽는 독자까지 내가 단 제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늘 걱정스럽다.
'일본침몰'
2011년 3월 11일 일본에서 진도 8.8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강진과 쓰나미가 일어 1만8500명을 넘게 사망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유례없는 비극에 국내 언론에서도 일제히 신문지면 1면을 통째로 할애해 보도했는데, 이때 일부 언론사가 내 건 제목이 바로 '일본침몰'이다. 대부분의 언론사가 이웃나라의 안타까운 참상을 전하는데 초점을 맞췄지만, 이들은 내심 지리한 대결구도의 한·일 관계를 자극하는데 방점을 뒀는지도 모른다. 이웃나라의 불행을 보며 통쾌해 할 것이라며 우리 국민성을 오해(?)했는지도 모른다.
또 한가지 사례가 있다.
"막장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마라." 십수년 전 화제가 됐던 조관일 대한석탄공사 전 사장의 말이다. 막장 드라마, 막장 국회, 막장 인생이라는 단어가 유행어처럼 회자되던 때다. 조 사장은 '막장은 희망입니다'라는 글을 통해 광산에서 제일 안쪽에 있는 지하의 끝부분을 뜻하는 막장이라는 말이 좋지 않은 단어의 대명사로 쓰이는 것에 대해 항의했다.
그는 "지하 수백미터 막장에서 땀 흘려 일하는 광부와 그들의 어린 자녀들이 '막장 운운'하는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가슴 아프겠느냐"며 "막장은 폭력이 난무하는 곳도 아니고 불륜이 있는 곳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막장이란 단어의 '막'은 어떤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 사용되는 용어이기도 하다"며 "드라마든 국회든 희망과 최고의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한 함부로 이 말을 사용하지 말라"고 일침했다. 그 후로 '막장'이라는 단어는 신문 제목에서 만큼은 사라졌다.
다다 다다 다다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말을 읊조리고 또 가볍게 쏟아낸다. 눈만 뜨면 들려오는 쿨함을 가장한 독설들, 그 거침없음에 환호하고 더 거친 말로 동조한다. 신문 제목과 달리 글자 수 제한도 없다. 마음과는 다르게, 또는 더 강하게, 속수무책 입 밖으로 뛰쳐나가는 말들. 그 정제되지 않은 어휘들로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게 한다. 서로의 생각이 다름을 이유로 분개하며 비천한 단어로 또 누군가를 노엽게 한다. 한 번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말의 힘, 그 크고 두려운 힘을 알고 있음에도 날마다 말 속에 날카로운 가시를 키워간다.
가시 달린 말뿐이 아니다, 경계해야 할 것은. 무심코 던진 기약 없는 약속과 빈말들. "우리 언제 밥 한번 먹자." 어찌 보면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 밥 한번쯤 같이 먹어도 좋을 사이로 남고 싶다는 의중이 담긴 말이지만, 그 '밥 한번'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상대방에게는 기대만큼 더 큰 상처일 수 있다. 좋은 의도건 나쁜 의도건 중요치 않다. 말도 신문 제목을 달 듯 뜯어보고 곱씹는 연습이 필요함이 분명하다.
혀끝이 요동칠 때마다 주문을 외우듯 어느 현자의 조언을 마음속에 되뇐다. "펄펄 끓는 냄비 뚜껑을 조금씩 열어두면 끓어오르던 내용물이 가라앉게 되는 것처럼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대화의 목적과 관계의 끝을 생각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황미란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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