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선 교수 |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 다오. 안갯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작곡가 이봉조가 영화 주제곡 '안개'를 만들었다. 열여섯 살 정훈희는 주제가를 부르며 가수로 데뷔했다. '안개'는 방송을 통해 삽시간에 전국에 퍼졌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감정으로 노래를 듣고 불렀다. 그해 가을, 육군 대위 함명규도 대구 육군병원에서 '안개'를 듣고 또 들었다. 중한 부상자였던 함명규에게 '안개'는 애창곡이 되지 못하고 애청곡일 뿐이었다. 눈을 뜨고 눈물을 감추며 걸어가야 할 그의 앞길이 안갯속 같았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많이 울었다.
함명규는 법관이 되고 싶었다. 충남대 법대에 입학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그에게 돌봐야 할 동생들이 아주 많았다. 2학년을 마치고 갑종 장교로 임관했다.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다. 성실하고 명민했다. 사람들은 그가 장군이 될 재목이라 입을 모았다. 결혼 직후 맹호부대 중대장으로 월남에 파병됐다. 1967년 9월 함명규의 집으로 전사 통지서가 왔다. 오보였다. 수류탄 파편이 복부를 관통했으나 함명규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는 강인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쏟아진 장기를 스스로 거둔 뒤 필리핀의 클라크 공군기지 병원으로 후송됐다. 대구 육군병원을 거쳐 대위로 예편했다.
법관의 꿈과 장군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접혔으나 함명규에게는 곱고 강한 아내 유행강이 있었다. 아내는 '마침내' 안개처럼 '붕괴'됐었을지 모를 그의 삶을 걷어 준 '단일한' 햇볕이자 바람이었다. 함명규는 성실하고 끈기 있게 일했다. 경제적인 수확은 적었다. 생계를 위해 아내가 생활 전선에 나섰다. 분식집을 열고 치킨 가게도 꾸렸다. 월세를 전전했으나 아이들이 잘 자라줬다. 아들은 운동과 공부를 잘했다. 음악에도 재능이 넘쳤다. 전국 소년체전에서 달리기로 은메달을 받았다.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아들은 법관이 됐다. 전국법관대표회의 의장을 연임한 함석천 판사다. 함 판사는 법관 밴드 '다락'에서 기타를 잡았다. 연구하는 법관으로도 정평이 난 함 판사는 학술단체의 저명한 학술상을 수상했다.
함명규는 쉰네 살의 너무 아까운 나이에 영면에 들었다. 국가를 위해 파병된 시절 입은 부상의 후유증이 깊었다. 대전현충원에 묻혔다. 함명규의 묘비 바로 곁에 의사상자와 순직한 소방공무원, 독도의용수비대 묘역이 있다. 제자들을 구하려다 목숨을 바친 단원고 선생님 열 분의 묘비도 거기 서 있다. 세월호 참사 때 삼백 명이 넘는 소중한 생명이 억울하게 사라졌다. 우리는 백일 전 백오십 명이 넘는 젊은이들을 10·29 참사로 또 잃었다.
1967년 열여섯의 정훈희가 영화 <안개>의 주제가 '안개'를 부를 때 우리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150달러가 되지 못했다. 2022년 일흔한 살의 정훈희는 <헤어질 결심>에서 '안개'를 다시 불렀다. 55년 만에 국민총소득은 3만 5천여 달러로 늘었다. 230배가 넘는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밤새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재난이라는 안개는 여전히 우리를 삥 둘러싸고 있다.
분별없는 정치권과 곳곳의 이기적 파당들이 앙칼지게 빚어낸 이념적 공격들도 '마침내' 짙은 사회적 재난이 됐다. 무진의 안개는 해가 돋고 바람이 불어야 걷힌다. 언론은 햇빛 아래 진실을 드러내고 바람으로 거짓 주장을 몰아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최소한 언론이 이념 갈등의 전장이 되거나 사회적 재난의 발원지가 되면 안 된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