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영 이사 |
그 시민은 조화를 한 다발 가져와 묘 앞에 꽂았고 눈을 다 치운 후에는 큰 절 두 번을 했다고 한다. 기자가 물으니 "타향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좀 더 대접받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국민이 홍범도 장군 알고 있다. 교과서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2019년 개봉한 영화 '봉오동전투'를 통해서 항일무장투쟁의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다. 특히 2021년 8월 머나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돌아가신 지 78년 만에 고국으로 봉환돼 대전현충원에 안장되는 과정이 언론을 통해 생생히 보도되면서 국민의 눈시울을 적셨다.
그런데 아직도 홍범도 장군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홍범도 장군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아픈 역사와 맞닿아 있다. 1868년 머슴의 자식으로 태어나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군대 나팔수와 제지공장 노동자, 백두산의 포수로 살던 그가 생존을 위해 시작한 일제와 싸움은 의병활동으로 이어졌다.
나라로부터 받은 것 없던 그가 나라를 지키고자 총칼을 들고 항일무장투쟁에 나서는 과정은 일제강점기 우리 민중의 상징적 초상이다. 홍범도 장군이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 정규군과 맞서 이룩한 전과는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촉발된 다양한 독립운동의 성과를 잇고 활발한 무장투쟁을 이끌어 내는 기폭제가 됐다.
하지만 일본의 강력한 토벌에 밀려 연해주로 이주해 새로운 투쟁을 모색하던 독립군들에게 볼셰비키와의 연대는 최선이었고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제국주의적 본능의 세계열강은 조그만 한반도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했기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세력과 연대해 일제를 무찌르는데 이념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 선택으로 홍범도 장군은 좌익독립운동가가 됐다.
1922년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해 레닌으로부터 권총과 군용외투, 금화 100루블을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은 그에게 좌익 낙인을 찍게 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상징적인 무장독립운동가였는지 증명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일부 사람들이 홍범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데서 비롯됐다.
100년 전의 일들을 지금의 잣대로 재단해 좌익독립운동가라고 배척하는 것이야 말로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는 꼴이 아닐까? 우리 정부는 홍범도 장군에게 무려 60년 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2021년에는 최고의 서훈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보수·진보정권을 가리지 않고 홍범도 장군을 추모하고 선양하는데 국비를 투입하고 있다. 필자가 살고 있는 유성구는 홍범도 장군 마케팅을 계획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말 모 방송사의 홍범도 드라마 제작에 협찬하는 예산이 좌익논란으로 전액 삭감됐다. 정부의 행정과 배치되는 결정에 못내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현실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홍범도 장군이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이후 전국을 넘어 해외에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설 연휴가 지나고 홍범도 장군의 묘소를 찾았을 때 수십 송이의 국화가 있는 것을 보고 많은 분이 다녀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홍범도 장군의 묘소를 찾는 발걸음에는 좌도 우도 없다. 오로지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헌신하다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 후 돌아가신, 정말 자랑스러운 홍범도 장군에 대한 고맙고도 존경스런 마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제 타향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좀 더 대접받으셨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눈 쌓인 묘소를 청소하던 한 시민의 말씀처럼 자랑스러운 장군, 홍범도를 감사의 마음으로 꼭 안아주었으면 좋겠다.
/오광영 (사)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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