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화폐 '한밭페이'가 2022년 9월 한빛탑 부근에서 열린 사회적경제기업 판매 플리마켓 '가치 플렉스'에 참여했다. 사진=지역화폐협동조합 제공. |
한밭레츠 회원이 1월 31일 샌드위치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 사진=한밭레츠 제공. |
높은 실업률로 침체했던 1983년, 캐나다 벤쿠버에서 '마이클 리턴'이 지역 화폐 '레츠(LETS)'를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선 1999년 박용남 선생의 소개로 들어왔다. 당시 사람들은 쓸모있는 기술과 시간이 있고 사람의 손을 기다리는 일거리도 많이 있지만, 거래되지 못하는 걸 보고 그는 돈이 없어도 거래하고 교환할 수 있는 레츠 시스템을 만들었다. 한 사람이 도움을 주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돌려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아기나 환자를 돌보거나 텃밭 가꾸기를 대신하는 행동이나 약속을 하면 그 대가로 공동체 안 다른 사람에게 서비스나 물건을 얻을 자격을 갖게 된다. 우리나라 고유 전통인 '품앗이'와 비슷하다.
누구나 잠재된 기술과 지혜가 있다는 철학이 핵심이다. 이 시스템으로 소외됐던 사람들이 유능한 공동체 구성원으로 자존감을 회복하고 지역 사회가 활기를 띤다. 이후 지역화폐 운동은 80년대 실업과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대안화폐 운동으로 전 세계에 확산했다. 지역화폐협동조합은 "애정과 돌봄과 같이 우리 삶에서 필요한 모든 것이 오늘날엔 시장에서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상품이 됐다"며 "이웃끼리 상호의존적 연대만으로 두려움 없이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지역통화 운동은 사회 가치가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20년 역사 국내 최대 지역 화폐 '한밭레츠'
한밭레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널리 유통되는 대안화폐로 2000년 2월 정식 창립됐다. 캐나다 지역 화폐 '레츠'를 대전에 접목했다. 외지인이 많고 정착률이 낮은 대전 지역 특성과 IMF, 맹목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폐해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만들어졌다. 지속 가능한 공동체 경제를 달성하기 위한 사회문화 운동이다. 한밭레츠에서 사용하는 단위는 '두루'다. 1두루는 1원의 가치를 갖고 있다. 소비할 때 현금과 두루를 같이 사용하지만, 현금과 두루를 교환할 순 없다. 거래 금액은 당사자 합의로 결정하고 농축수산물과 회원업소를 제외하고 거래 전체 금액의 30% 이상은 두루를 사용해야 한다. 운영자금은 회비와 거래 수수료로 마련하고 있다. 두루 생태계가 작지만, 가치 소비와 나눔을 통해 균형을 회복하고 있다.
대전 서구의 한 카페에 한밭페이로 결제할 수 있는 QR코드가 있다. 사진=이유나기자. |
2020년 9월 출범한 '한밭페이'는 앱을 이용한 전자결제 민간주도 지역 화폐다. 호혜 소비를 통해 지역에 돈이 순환되고 지역경제가 활성화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마을활동가·시민단체회원·사회적 경제종사자·골목상권 상인이 만나는 플랫폼이다. 대전시민이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으며, 대전에 있는 한밭페이 가맹점에서 전자결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한밭대학교 컴퓨터 공학과가 기술 개발을 주관하고 사회적경제연구원이 운영시스템을 고안했다. 한밭페이가 시작된 2020년부터 지역화폐협동조합도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밭페이 인센티브는 기부다. 돈을 충전하면 '드림포인트'가 쌓이는데, 충전 금액의 2%는 기부금으로 적립돼 사회문제 해결프로젝트에 후원된다. 지역 비영리단체뿐만 아니라 한밭페이 이용자면 누구나 어플 내 플랫폼 '드림프로젝트'에서 기부 프로젝트를 등록할 수 있다. 이외에도 한밭페이 앱 안에서 사회경제기업의 서비스를 예매할 수 있는 '드림티켓'과 지역 소상공인 상품을 선물할 수 있는 플랫폼 '드림 상점'도 운영한다.
이원표 한밭페이 이사는 "한밭페이를 소비하면 우리 동네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효과가 있다"며 "이 같은 장점에 환전 수수료가 있는데도 가맹점 호응도가 높다"고 했다. 또 한밭레츠와 달리 현금 환전과 대출이 가능하다. 환전은 가맹사업자만 할 수 있으며, 환전 수수료 3%는 기부금과 운영비로 쓰인다. 대출 '땡겨쓴 돈' 서비스는 정기 충전자만 사용할 수 있다. 매월 정기충전한 드림을 모두 사용하면 다음 달 약정 금액만큼 미리 쓸 수 있다. 빌린 돈은 다음 달 충전일에 맞춰 차감된다.
규모는 지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가입자는 매년 1000명씩, 가맹점은 100개씩 늘고 있다. 현재 회원은 3000여 명, 가맹 점포는 400여 곳이 운영 중이다. 연간 총 발행액은 약 5억 원이며, 기부금은 1000만 원으로 집계된다. 상인회나 마을 공동체가 발달한 동네에서 환영받고 있다. 가맹점이 지역 경제 활성화를 돕는 구조이기에, 지역에서 오래 장사를 하면서 애정을 갖는 상인들이 주로 참여한다. 서구 관저동, 중구 태평시장, 유성구 신성동·원내동·학하동, 대덕구 법동, 품앗이마을과 한살림 생협이 거점이다.
이용수 태평시장 상인회장은 "한밭페이 가맹 등록을 통해 새로운 소비자를 만날 수 있는 장점이 크다"며 "환금 수수료도 부담되지 않고 지역 사회에 공헌할 수 있어 참여하고 있다"고 답했다.
기후화폐 '그루'를 관리하는 그루 통장. 사진=이유나기자. |
한밭레츠는 2021년 기후화폐 '그루'로 진화했다. 경제 규모를 성장시키지 않는 '탈성장' 실천 대안으로,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개인과 단체 사업자 네트워크에서만 통용되며 이자가 붙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활동을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지구와 함께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이는 경제발전이 지구 온난화의 원인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현대사회에서 화폐를 벌고 쓰는 일은 상품 소비로 연결되고 탄소를 배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화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정책을 신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등 저탄소 경제구조로 전환하면서 고용과 투자를 늘리는 정책인 '그린 뉴딜'을 지역 화폐에 활용했다.
다회용컵 사용하기와 같은 탄소를 줄이는 실천을 하면 기후화폐를 얻을 수 있고, 친환경 서비스나 상품 구매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기후화폐 실천단인 '쑥쑥단'에서 탄소감축 활동을 하면 직접 발권자가 돼 통장 '그루기록장'에 기록한다. 이렇게 얻은 그루로 사회경제적 업체, 기후 학교, 기후 품앗이, 기후 페스티벌에 사용할 수 있다. 사업이 종료할 때 참여자들은 밴드에 적립한 그루합계를 올리고 환경에 진 빚인 '석탄지수'를 얼마나 차감했는지 보여준다.
기후 화폐를 만든 오민우 한밭레츠 이사는 "발전만 향해 달려가는 금융시스템이 기후위기의 원인이기 때문에 탈성장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기후화폐는 지역화폐에 가치 소비 개념을 강화해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고 했다.
이유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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