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네와 딸네 식구가 모두 온다는 소식에 가장 반가워한 사람은 아내였다. 시장을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분주하게 오간 아내의 손길은 연일 바빴다. 지지고 볶고 삶고 무치는 따위의 음식 장만은 마치 아이들이 결혼하던 때를 방불케 했다.
이윽고 딸네가 하루 먼저 도착했다. 올부터 다섯 살이 된 외손녀를 품에 안은 아내는 그때부터 싱글벙글 외에는 당최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그렇게 좋아?" "그럼~ 내 새낀데."
이튿날, 그러니까 설 하루 전에는 아들네도 집에 들어섰다. 아내의 입은 귀를 넘어 머리 부근까지 올라갔다. "우리 손자 어서 와~" 팔짝 뛰어온 친손자 역시 아내의 품 안에 폴짝 안겼다.
정겨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자니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좋은 것은 역시 가족이라는 사실에 방점이 찍혔다. 드디어 설날 아침. 차례상을 준비하고 선친께 절을 올렸다.
정말 오랜만에 가족 모두가 설날 차례를 지내는 모습에 아내는 감격스러운 모습이었다. 떡국과 차례 음식을 나눠 먹은 아들네와 딸네 식구들이 우리 부부에게 세배를 했다. 세뱃돈을 꺼내 손주에게 건네는 아내의 표정은 더욱 행복 만점의 정점이었다.
"길 막히기 전에 서둘러 가려무나." 아이들이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이튿날 아내는 다시금 사찰을 찾았다. 가족의 건강과 나의 저서 베스트셀러를 간절히 기원(祈願)하고 발원(發願)까지 했다고 한다.
그사이 나는 다섯 번째 출간 예정인 새로운 저서의 탈고(脫稿)를 마쳤다. 최종 교정을 보는 가운데 아내가 귀가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진작 오지 않고…." 아내의 휴대전화가 울었다. 딸의 시어머니인 안사돈이랬다. 두 아낙의 수다가 요란했다.
"제 남편요? 호호~ 여전히 술 잘 먹지요… 줄이라고 해도 제 말을 잘 안 들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바쁘고 술에 떡이 되어도 자신의 할 일은 다 한답니다. 작년에는 그 바쁜 와중에도 대학원에서 장학생으로 공부를 마쳤어요. 다음 달에는 또 다른 책도 나온다네요."
겨우 꺼벙이(성격이 야무지지 못하고 조금 모자란 듯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에 불과한 나를 그래도 서방이랍시고 온갖 치장으로 발쇠꾼(남의 비밀을 캐내어 다른 사람에게 넌지시 알려 주는 짓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역할까지 하는 아내를 보며 나 역시 넉넉했다.
그런데 시베리아보다 더 춥게 느껴지는 북극한파의 기습으로 한반도가 꽁꽁 얼어붙었다. 그 영향으로 아내는 끝내 몸져누웠다. 이 추운 날씨에 차가운 법당에서 기도하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문득 이방와처(二訪臥妻)라는 신판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아이들, 즉 '내 가족들이 두(2) 번만 우리 집을 방문하면 아내는 그 수발을 들다가 끝내는 드러눕는다'는 의미를 담았다. 꿍꿍 앓는 아내의 머리에 물수건을 얹어주며 나도 간절히 소망(所望)했다.
'올해는 당신도 부디 아프지 마시구려. 또한 다음 달에 출간될 다섯 번째 저서는 반드시 베스트셀러를 기록하여 넉넉한 인세만으로도 당신과 어디로든 여행을 가고 싶소. 그러자면 뭐니 뭐니 해도 당신의 건강이 관건입니다!'
여행은 가슴이 뛸 때 가야 한다. 더 늙고 병까지 든다면 다리부터 여행을 거부한다. 다행히 아내는 이튿날부터 호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홍경석 / 작가 · '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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