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규 한국기계연구원 기계기술정책센터장 |
산업기술 중심의 시대로부터 기술패권의 시대로 변화하는 시점에서 국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과학기술 측면에서 기술 패권의 두 가지 축은 변함이 없다. 2015년 전후로 시작된 디지털 전환(4차 산업혁명)과 탄소중립(기후변화)이 그것이다. 이 축에서 파생된 다양한 신기술, 신사업의 인프라 구축은 상당한 투자를 수반하므로 국가적 인프라를 구축해야 하고 외교·안보적으로 중요한 공급망 관련 기술 등을 종합하여 국가 전략기술을 체계적으로 수립하고 추진해야 한다.
이에 따라 미국·중국·일본 등 주요국들도 국가 전략기술 육성을 통한 기술패권에 주력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배터리, 의약품, 희토류 등 10대 전략기술 분야를 선정해 첨단기술에 공공투자를 확대하면서 공급망 자립 및 동맹국과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14차 5개년 및 2035 중장기 계획'을 통해 인공지능, 스마트제조 등 15대 전략기술을 육성하고 미국 기술 제재가 집중되는 영역의 기술 자립을 추구하고 있다. 일본도 사회문제 해결과 경제안보와 직결되는 반도체, 첨단제조 분야 등 전략기술 분야에서 기술 확보 및 공급망 관리를 추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22년 10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기술주권 확보를 통한 과학기술 G5 도약을 목표로 반도체·디스플레이, 이차전지, 첨단모빌리티, 차세대 원자력, 첨단 바이오 우주항공, 수소, 사이버보안, 인공지능, 첨단로봇·제조, 차세대 통신 양자에 이르는 12대 국가 전략기술 및 50개 세부 중점기술을 선정하고 투자를 집중할 계획을 발표했다. 국가 전략기술이 성공에 이르려면, 장기적 로드맵을 통한 비전이 제시돼야 하고 새로운 정책 발표보다 단계별 체계적 이행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제는 12대 전략기술을 중심으로 장기적인 투자로 역량을 축적하면서, 신사업의 국가 인프라를 국책 연구원, 민간과 함께 구축하며 기술 주권을 확보해나가야 한다.
국가 전략기술은 단기간에 성과를 거두기보다 긴 호흡으로 바라봐야 한다. 과학기술의 패러다임이 크게 변화하는 시기에는 다음 세대를 위한 신산업과 먹거리가 펼쳐진다. 독일의 칼 벤츠가 1885년 최초의 가솔린 엔진으로 삼륜차를 선보인 이후 1926년에 벤츠 공장을 설립해 대중화에 성공할 때까지 40년 이상이 걸렸다. 스크린을 터치하는 방식의 터치스크린 기술도 1970년대 토론토대에서 개발한 이후, 다양한 보편화 시도가 있었지만 2007년 아이폰 출시 등 스마트폰 시대와 함께 본격화됐다. 터치스크린 기술도 대중화까지 약 40년이 걸렸다.
국가는 정권의 변화나 대외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역량 축적과 튼실한 인프라 구축에 투자를 준비할 수 있도록 이행 정책과 제도를 정비하고, 국책 연구소들은 기존과 다른 접근 방식으로 국가 임무형 연구에 중심을 두고 산학연 연대를 추진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IMF, 글로벌 금융위기 등 수많은 글로벌 위기 상황에서도 경제 강국, 과학기술 강국의 위상을 다져왔다. 기다림 후에 우리나라가 새롭게 재편된 기술주권 강국이 되리라 믿는다. 이용규 한국기계연구원 기계기술정책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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