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공론] 아버지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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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공론] 아버지의 뒷모습

정기옥/소설가

  • 승인 2023-01-17 09:45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집 담장 너머 대나무 숲이 있었다. 대나무에 부딪히는 바람소리가 마치 소박맞은 여인네의 우는 울음소리 같았다. 대나무 결을 스치는 바람소리는 어린 나에겐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는, 반은 농촌이고 반은 어촌인 천혜의 자원이 많고,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곳 충남 보령시 천북면 사호리라는 마을이었다. 집 앞으로는 드넓은 서해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고, 뒤로는 야트막한 동산이 있었다. 그 해에 여덟 명의 아이가 마을에 태어났다. 또래 아이들 중 나는 유일한 여자 아이였다.

유년 시절 나는 또래 남자 애들과 주로 땅 따먹기라든지 비석치기, 깡통 차기를 하며 해 지는 줄 모르고 뛰어놀았다.

고향 바닷가, 갯벌은 온갖 진귀한 보물 창고였다. 바람에 실려 오는 비릿한 갯벌 내음을 맡으며 나는 조개도 캐고 소라도 잡았다. 더운 여름날에는 바닷가 얕은 곳에서 언니들과 개헤엄을 치며 놀았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닷가로 나가 조개를 캤다. 갯벌 위에서 호미질 할 때마다 진흙 갯벌 속 숨어있던 조개는 물을 쭉 내품으며 싱싱한 생명력을 맘껏 드러내었다. 밭일 하기는 죽어도 싫어하는 내가 조개는 잘 캔다며 아버지는 기뻐하셨다.

청정한 갯벌에서 잡아온 살아있는 조개를 소금물에 조물조물 문질러 해감시킨 뒤 된장국도 끓여먹고 미역국도 끓여 먹던 유년의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텃밭에서 막 캐낸 잘 여문 감자를 칼로 까서 고추장을 풀어 가끔씩 감자 국을 끓여 놓고 부모님을 기다렸다. 그리고 앞마당을 빗자루로 쓸거나 툇마루를 걸레질 하였다.

농촌은 언제나 일손이 부족해서 고사리 손이라도 보탬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책 읽는 것과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였기에 부모님을 많이 돕지는 못했다.

아버지는 부지런했다. 여름이면 꼭두새벽 동트기 전부터 들로 나가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사시사철 일에 파묻혀 살았다. 봄, 여름, 가을은 밭에 곡식을 심고, 키우며 거두어 들였다.

겨울에는 바닷가에 나가 김을 뜯었다. 바닷물이 흠뻑 섞여 무겁게 가라앉은 물김을 아버지는 큰 통에 얹어 지게에 지고 집으로 왔다. 살을 에는 겨울의 추위도 아버지의 걸음을 막지 못했다.

아버지는 마당 샘터의 펌프에 뜨거운 마중물을 한 바가지 부어 얼어붙은 펌프를 녹였다. 이윽고 펌프에서 콸콸 쏟아지는 찬물을 큰 대야에 받아 김발에 김을 떠 쨍쨍한 햇볕에 말려 널었다. 정성들여 만든 마른 김을 100장씩 한 톳을 만들어 5일장에 나가 팔았다. 등허리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일곱 남매를 온몸으로 키워내느라 아버지는 손과 발이 쉴 새가 없었다.

나는 자식에 대해 교육열이 높으셨던 아버지의 열성을 힘입어 중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너 충청도 시골에서 올라왔다고 했지? 사투리 써봐. 충청도 사투리는 그랬어유, 저랬어유 한다며?"

낯선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그러잖아도 주눅 들어 기를 제대로 못 펴고 있던 터였다. 그런 나를 빙 둘러싸고 놀려대는 서너 명의 계집애들 앞에서 아무 대꾸도 못하고 익은 사과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시골학교에서는 그나마 두각을 나타내고 주목받던 나란 존재는 대도시 수많은 아이들 중 하나의 점에 불과하였다.

나의 자존감은 서울로 전학 온 이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직장생활을 하는 언니 두 명과 단칸방에서 자취를 하면서 겨울이면 연탄을 갈아야 했다. 오평 남짓 되는 단칸 방, 언니들이 잠을 청하면 나는 방 한 귀퉁이 책상에 앉아 늦은 밤까지 홀로 공부를 하였다.

풍경 좋던 시골, 마당 넓은 집과 담장 울타리 같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던 부모님 품속을 떠나 도시 단칸방에서의 언니들과의 자취 생활은 한참 예민한 나이의 사춘기였던 나의 자존감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서울에서 태어난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과 한 집에 살면서 남부럽지 않게 지원받으며 학교를 다니는 것만 같았다. 그 아이들 앞에만 서면 스스로 시골뜨기처럼 생각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이다. 쉬는 시간에 친구가 나를 불러 세웠다.

"기옥아. 네 아버지가 오셨어."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햇볕에 그을려 얼굴은 시커멓고 단번에 누가보아도 시골에서 막 올라온 것 같은 늙고 추레한 아버지가 서 있었다.

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와서 반가워서 달아오른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학교에 왔다는 사실이 기쁘기보다 서울 친구들 앞에서 시골 농부 아버지의 존재가 그저 민망하고 창피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기껏 양복을 차려 입고 왔으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걸친 것처럼 누가 봐도 시골 사람이었다.

나는 물었다.

"아버지, 어쩐 일이셔요?"

"막둥이 보고 싶어서 왔지. 서울에서 공부는 잘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담임선생님 뵙고 인사도 할 겸 학교로 찾아왔다."

아버지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가 친구들 눈앞에서 어서 빨리 사라져 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어쩔 줄 몰라 어색해 하는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아버지는 내 손에 2만 원을 쥐어주었다.

"잘 있어라."

아버지는 짧게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 계단을 내려갔다. 교실 창문 밖으로 한참동안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운동장을 가로 질러 교문 밖을 나서는 아버지의 축 쳐진 어깨가 보였다. 그 처량한 뒷모습이 어찌나 쓸쓸해 보이던지…….

하교 후 나는 자취하는 집으로 터벅거리며 돌아왔다. 단칸방 책상 위에 덩그러니 편지 한통이 놓여있었다.

"막내야. 타지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 너를 서울로 보낸 날 대나무 숲 바람결에 대나무 잎들이 구슬피 소리를 내며 막 울더구나. 그 음울한 소리가 꼭 내 마음 같았지. 너는 가고 없는, 네가 잠자고 뒹굴던 쓸쓸한 빈 방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더구나. 네가 쓰던 이불과 베개, 너의 온기와 체취가 그립다며 네 엄마는 한 달여 그렇게 끌어안고 자더구나. 나는 밤마다 허전한 가슴 부여잡고 말없이 눈물지었지. 서울 애들 앞에서 기죽지 말고 당당히 가슴 펴고 다녀. 힘내라."

아버지의 편지를 부여잡은 손끝의 미세한 떨림은 어느 새 노을 지는 바닷가 석양의 충만함으로 내 마음을 물들이고 있었다.

정기옥/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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