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대전대 경찰학과 교수·대전자치경찰위원 |
승부욕 넘치는 우리 사회도 자녀를 통한 대리전이자 설욕전으로 넘쳐난다. 아이의 기(氣)를 살려 줄 수만 있다면 점잖은 체면을 구긴대도 부모는 기꺼이 감수하려 든다. 문제는 토끼처럼 언덕을 잘 오르는 특성을 가진 아이인지 아니면 거북이처럼 헤엄을 잘 치는 아이인지 가리지 않고 경쟁과 승부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이기려고만 드는 맹목성이다.
만약 스포츠맨십에 어긋난 행동을 한 토끼와 몰인정한 거북이의 태도를 문제 삼아 재경기를 추진한다고 한다면 토끼는 이번만큼은 낮잠 같은 것은 개나 줘버리라고 투지를 불사를 것이다. 당연히 토끼는 단숨에 정상에 다다를 것이고 승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거북이가 이번에는 경기를 강에서 하자고 역제안을 한다면 이야기는 반전을 가져올 것이다. 토끼는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고 거북이가 승리할 것이다.
토끼와 거북이는 처음부터 '언덕 오르기'로 승부를 겨룰게 아니었다. 애초에 거북이가 토끼보다 먼저 언덕을 올라야 하는 게임은 그 자체가 불공정한 것이었다. 토끼 역시 강을 헤엄쳐야 하는 경기였다면 패배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경기는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승패에 민감하고 쉽게 결과에 승복하지 않으려는 우리 사회는 그동안 하나의 운동장에서 유일한 기준만을 가지고 언제나 결승전만 해온 탓도 있다. 패자부활전조차 없이 말이다.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해 보다 다양해진 견해는 승패의 기준을 개인적 능력보다는 사회적 가치와 공헌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고대 아테네의 올림픽처럼 승패보다는 경기 자체가 우리 사회공동체를 보다 건강하게 만들고 이웃을 신뢰하고 협력하게 하는 사회적 자본 증가에 얼마나 기여하는가에 보다 많은 관심을 둘 때다. 우화에서처럼 게임 중에 잠을 자거나 잠든 상대를 그냥 놔두고 승부에만 집착한 참가자 모두는 패배자다.
지금껏 심판의 경기 진행의 공정성과 승패에만 집착해 왔다면 이제는 그 기준이 되는 규칙 자체가 과연 지금도 정의로운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암기력 편향의 승부를 보다 다양한 겨루기로 나누어야 한다. 우리 사회 다양한 곳에서의 성공스토리가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려면 승부가 공정하고 결과로서 승자와 패자 모두의 편익이 경기 전보다 나아져야 한다. 선한 경쟁은 모두의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모두가 승자가 되어야 하는 세상이다. 아름다운 인생에서 루저란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 Win-Win 게임이 될 수만 있다면 겨루기는 승패를 떠나 모두에게 참된 기쁨과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다. 우화에서처럼 혹시나 토끼가 잠을 자는 우연을 현실에서 기대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렇다고 성실과 근면만으로 모두가 닌자 거북이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더 이상 거북이의 승리에 열광할 수 없는 이유다.
애초부터 토끼와 거북이에게 경주란 있을 수 없었다. 잠을 자는 토끼와 그런 토끼를 외면하고 승부에만 집착한 거북이 모두가 패배했다. 경기 결과를 보며 토끼와 거북이는 서로를 부정하며 비난했을 것이다. 이후 그 언덕에는 두 번 다시 이들의 멋진 경기는 없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아름다운 경주를 통해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고 익히는 일이다.
성공의 사다리가 상당부분 치워진 현실 앞에서 소위 MZ 세대가 느끼는 열패감은 출발선에 선 거북이의 심정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선수 자신보다 운동장이 승패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경주에서는 산도 있지만 강도 있다. 강을 만나면 토끼는 거북이의 등에 의지해야만 한다. 자신의 장점으로 서로를 돕는 지혜로운 토끼와 거북이의 멋진 리턴매치를 기대한다.
이상훈 대전대 경찰학과 교수·대전자치경찰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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