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종학 교수 |
그러면 숙맥의 진짜 뜻은 무엇일까? 숙맥은 콩과 보리를 일컫는 말이다. 콩 숙(菽), 보리 맥(麥)이다. 이런 말이 어떻게 해서 부족하거나 뭘 모르는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을까? 숙맥은 원래 '숙맥불변(菽麥不辨)'의 줄임말이다. 콩과 보리조차도 구별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에 부족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 것이다.
젊은 세대는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농업시대에 콩과 보리는 주변에서 너무나 자주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곡물이었기에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기본 상식조차 없다는 것으로 다분히 경멸하는 의미가 내포된 부정적인 말이다. 그렇기에 타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는 것은 모욕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실은 필자야말로 세상 물정에 있어서 완전 숙맥이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할 때 집을 살 줄 몰랐고, 주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신기록을 경신해 나갈 때는 주식의 주자도 모르다가 소위 끝물에 들어가서 속 쓰림을 당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좋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보는 눈도 정말 없어서 나름 믿음을 주고는 한순간에 배신당하기를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였다. 오죽하면 배신한 자로부터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도 없느냐고 값싼 동정을 받기도 하였을까. 옳다고 믿었던 것이 그름으로 판명 나 부끄러움에 몸 둘 곳을 찾지 못했던 기억은 또 얼마나 부지기수였던지…
사정이 이와 같으니 필자는 필경 보리와 콩도 구별 못 하는 숙맥임에 틀림이 없다. 사적 영역에서 형편이 이러하니 하물며 공적 영역에서는 오죽할까? 나라 발전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고, 우리 지역이 나아갈 길은 무엇인지와 같은 주제에 대하여 어찌 훈수 한마디 던질 수 있을까? 지려천박한 필자로서는 다가갈 수 없는 주제다.
그렇지만, 아니 그럴수록 필살의 생존법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름대로 비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오래전 들었던 다음과 같은 말을 기도하듯 되뇌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또는 해야 할 일을 과감히 수행할 용기와 내가 할 수 없는 일, 해서는 안 될 일을 주저 없이 접을 수 있는 겸손,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할 지혜를 주소서'라고 말이다.
실생활에서 위 셋은 그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중에서도 해서는 안 될 일, 할 수 없는 일을 뒤돌아보지 않고 내려놓는 겸허함을 갖추기가 정말 어렵다. 왜일까? 공익 추구로 포장된 과욕 담긴 공명심, 한 점 바람에도 스러질 얇디얇은 자존심이 그 원인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는 마땅히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할 수 없는 일을 준별(峻別)할 지혜를 발휘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한다. 즉 욕심에 눈멀어 지혜가 가려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숙맥불변이다. 콩과 보리조차 구별할 지혜가 없는 것이고, 이를 초래한 원인자가 바로 헛된 자아도취식 공명심이고 주제넘는 욕심이다.
검은 토끼해라는 계묘년 새해가 열렸다.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망을 이야기하고, 이루고 싶은 꿈을 마음속에 새기는 시기이다. 올 한해 품어보는 꿈은 무엇일까? 토끼는 풍요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동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특히 검은색은 인간의 지혜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 기운 받아 올 한해는 콩, 보리도 구별 못 하는 숙맥불변(菽麥不辨)의 시대에서 벗어나 콩, 보리 정도는 분별할 수 있는 숙맥가변(菽麥可辨)의 해로 만들어 보고 싶다. 어떻게 하냐고? 헛된 욕심 내려놓으면 콩, 보리 정도는 헤아릴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그래서 기도해본다. 날개가 있다고 다 새가 아닌 법, 파리를 어찌 새라 할 수 있을까? 계묘년 한해 새와 파리를 구별할 혜안을 주소서.
/손종학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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