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용 선생(90·제천시·국악단체인 속수승평계 첫 증언자)이 기억으로 직접 그린 속수승평계(1918년) 연습장소(빨간색 부분)'. 그가 그린 연습장소는 이건연 속수승평계 서열 3위의 간부급 단원 집으로 추정된다. 이건연의 4대 후손은 "증조할아버지 집에 가야금 등이 있었고 사람들이 수시로 와, 연습했다"고 첫 증언했다. 제천=손도언 기자 k-55son@ |
본보가 이번엔 우리나라 최대규모로 알려진 국악단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과 그 인물의 후손을 처음으로 찾아냈다.
중요 인물은 '서열 3위'로 알려졌지만, 국악단체의 실질적인 핵심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가상의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이었다.
본보는 서열 2위였던 '이태흥(李泰興·1871~1940년)'에 이어 서열 3위인 인물을 처음으로 보도한다. 그로 인해 청풍승평계와 속수승평계의 국악단체 조직 배경과 가치 등의 숨은 베일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청풍승평계는 어떤 국악단체였고, 어떤 이유로 창단된 것일까. 또 서열 3위의 그의 후손은 또 어떤 얘기를 들려줄까. 제천 국악단체의 실체가 조금씩 그 신비로움의 베일을 벗겨내고 있다.
본보가 1년 6개월가량 청풍승평계와 속수승평계를 추적한 결과 우리나라 최대규모 국악단체로 알려진 청풍승평계 단원이자, 속수승평계 우두머리 간부급 단원인 서열 3위는 이건연(1875~미확인)이다. 이건연은 국악단체의 창단 배경 등을 글로 남긴 인물이다.
청풍승평계(1893년 창단)에서 속수승평계(1918년 재창단)로 자리를 옮긴 이건연은 제천군지에 '1918년도 속수승평계를 조직하면서…'라는 서언(책 등의 첫머리에 책을 펴내게 된 동기나 경위)을 남긴 것이다. 이건연은 실존 인물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후손들이 드러나지 않아서다. 그러나 이건연의 후손이 본보 취재결과 드러나면서 그의 존재도 밝혀졌다.
이건연은 서언을 통해 이런 글을 남겼다.
"승평계의 설립이 계사년(癸巳年) 1893년 중춘(仲春·완연한 봄)이다. 음악의 운율은 (제천)청풍호 경치와 일치하고 음악하기 좋은 곳이다. 청풍승평계 단원들의 악기비용, 활동비용 등은 속수승평계에서 더 증액한다. 이런 내용은 청풍지역 현인들, 즉 유지들과 논의했다. 논의결과 청풍승평계에서 받았던 10냥을 속수승평계에서 2원으로 책정한다. 풍소재자(風騷才子), 즉 풍류객은 이 '악(樂·청풍승평계)'을 교훈 삼아서 영원토록 전승하라. 다음 세대는 청풍승평계를 보고 느껴서, 국악의 세계화와 대중화에 앞장서야 한다. 1918년 4월 16일 이건연의 서(緖)"라고 글을 남겼다.
이건연은 국악단체의 창단 배경과 연습 장소, 악기분포, 단원들의 활동, 악단 규칙 등을 자세하게 글로 설명해 놨다. 특히 이건연은 서언 말미에 국악의 세계화를 강조했는데, 현재 우리나라 국악은 이미 'K- 국악'으로 발전된 상황이다.
'이건연' 직계 4대 후손(後孫)인 증손녀 A(여·88)씨는 본보와의 첫 구술증언을 통해 "집에는 가야금과 아쟁 등이 있었지만, 큰 장마와 수몰 등으로 악기 등은 현재 모두 없어졌다"며 "증조할아버지(이건연) 선후배들이 집에 수시로 찾아와 악기 등으로 연습했다고 증조할머니와 할머니 등에게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증조할아버지(이건연)은 전국에서 유명했던 인물로 알고 있다"며 "증조할아버지뿐만 아니라 국악단체 역시, 전국에서 중요한 (국악)단체였다고 들었다"고 강조했다.
이건연의 증손녀인 A 씨는 '1918년 속수승평계 첫 증언자인 이장용(90) 선생과 같은 마을(제천시 청풍면 읍하리)에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장용 선생은 지난해 1월, 본보와의 첫 인터뷰에서 속수승평계 단원들의 연습장소와 불과 100m거리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장용 선생이 지목한 단원들의 연습장소가 이건연의 집으로 알려졌다. 제천=손도언 기자 k-55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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