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아직 못 봤지만 '하얼빈'은 일독했다.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로 평가받고 있는 소설가 김훈의 신작 장편소설 『하얼빈』은 책 안에서 이토 히로부미로 상징되는 제국주의의 물결과 대한 남아 안중근으로 상징되는 청년기의 뜨거운 열정이 부딪친다.
아울러 살인이라는 중죄에 임하는 한 인간의 대의와 윤리가 격돌한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죽인 뒤 수감된 안중근을 일본인 재판관 마나베가 심문하는 장면이 더욱 정의롭다.
Q. 안중근 당신이 진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를 진술하라.
A. 나의 목적은 동양 평화이다. 이토(히로부미)는 한국에 통감으로 온 이래 태황제를 폐위시키고 현 황제를 자기 부하처럼 부렸다. 또 타국민을 죽이는 것을 영웅으로 알고 한국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십수만 한국 인민을 파리 죽이듯이 죽였다. 이토, 이자는 영웅이 아니다. 기회를 기다려 없애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하얼빈에서 기회를 얻었으므로 죽였다. (P.236~237)
새삼 대한의 영웅이자 남아의 기개(氣槪)까지 출중했던 청년 안중근을 재발견하는 기회였다. 중국 전국시대의 협객이자 자객이었던 형가(荊軻)는 시황제를 암살하기 위해 도모했으나 실패한 일화로 유명하다.
그의 생애에 대해 잘 알려진 것은 없으나 《사기》와 <자객 열전>, 《십팔사략》에 그에 관련된 이야기가 남아 있다. 특히 <자객 열전>에 있는 형가의 기록은 중국 고서상 가장 스펙타클하기로 손에 꼽는 대목이다.
역사에서 '만일'은 의미가 없다. 만일(萬一)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뜻밖의 경우와 함께 만 가운데 하나 정도로 아주 적은 양이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얘기다. 그렇긴 하지만 당시에 만일 형가가 시황제를 죽였더라면 역사는 과연 어찌 흘렀을까?
안테나를 돌린다. 안중근이 일본 경찰과 재판관으로부터 고초를 겪을 당시, 채가구역에서 검거된 우덕순 또한 신문을 받았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성장 과정이나 세습된 환경이 전혀 달랐다.
안중근은 남부럽지 않은 토호(土豪)의 자식이었지만 우덕순은 극빈의 하층민이었다. 일반적으로 토호의 자식은 현실에 안주하고 부모가 물려준 금전 옥답으로 호의호식을 지향한다.
하지만 안중근은 그조차 배격하고 애국심을 바탕으로 철저히 조국을 강탈한 이토를 죽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존경심이 더해가는 이유다. 반면 우덕순은 고향 산천을 떠나 이국 만 리에서 갖은 고생을 겪었다. 그럼에도 정작 고향의 아내에게는 변변한 생활비조차 보내줄 수 없었다.
여기서 그나 나나 같은 빈민(貧民)이라는 동병상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빈곤은 분명 고난이다. 물론 그곳이 종착역이 아니라 일시적 정류장이라는 긍정과 함께 얼마든지 탈출이 가능하다는 자신감만 있다면 된다.
그 또한 남아(男兒)이기 때문이다. 기개의 남아 안중근을 다시 만나면서 위대한 그의 어머니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조마리아 여사는 안태훈과의 사이에 안중근(1879~1910), 안성녀(1881~1954), 안정근(1884~1949), 안공근(1889~1939) 등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장남 안중근이 중국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고, 차남 안정근은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군단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삼남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항일 의거를 성사시켰으며, 딸 안성녀는 안중근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다.
조마리아는 자식들을 모두 독립운동의 제단에 바친 진정 장한 애국 어머니였다. 조마리아 여사는 죽음을 앞둔 안중근을 면회하지 않았다. 아들을 보면 흐트러질 수 있을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제어한 것이었다.
다만 안중근에게 이르길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먹지 말고 당당하게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는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
결론적으로 애국(愛國)도 모전자전(母傳子傳)이다. 강한 어머니가 튼튼한 아들을 만든다.
홍경석 / 작가 · '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 저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