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바와 같이 한자는 표의 문자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단어요 음절이기도 하다. 때문에 표어문자라고도 한다. 조자 원리에 따라 상형이나 형성, 회의와 같이 기억이 용이한 경우도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글자마다 뜻풀이도 어렵지만, 문장이 되면 시적 표현과 같아 해석이 더욱 난해해진다. 때문에 수많은 해설서가 등장한다. 어떤 것이 더 바르냐는 논쟁도 심하다.
천자문은 1구 4자의 문장으로 된 고시(古詩) 250구로 되어있는데, 동일한 글자가 없다. 그것도 경이롭지만 문장 내용이 쉽지 않다. 해설을 따로 공부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문득 마음에 와 닿는 금과옥조(金科玉條) 문장에 종종 놀란다.
오늘은 '척벽비보(尺璧非寶)'를 쓴다. 많은(한 자나 되는) 구슬(옥)이라도 꿰지 않으면 보배가 아니라는 의미다. 우리가 흔히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 사용하는 말이다. 얼마나 많은 지식정보가 세상을 떠도는가? 그를 잘 엮고 꿰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생각에 이른다. 항상 쓰는 글이지만 제대로 꿰고 있나 돌아보게 된다.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말에 대한 의문이다. 대부분 '한 이치로 모든 것을 꿰뚫는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관은 꿰뚫다, 관통하다, 적중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꾸러미, 꿰다는 의미도 있다.
일이관지는 논어 위령공편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가 제자에게 "나를 많이 배우고 모든 이치를 다 아는 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고, 스스로 답한다. "아니다, 나는 한 가지 이치로 모든 일을 관통한다.(非也, 予一以貫之)"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공자가 자공에게 안회의 총명을 물었을 때 자공이 답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聞一知十, 논어 공야장편)"와 비슷한 말이 된다. 우리가 총명한 사람을 이를 때 하나를 알면 열을 안다고 하는 것과 같다. "하나로 꿴다.", "하나로 꿰뚫고 있다"로 해석해도 이상할 것은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궁금해서 더 찾아보니, 이인 편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공자가 "나의 도는 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라고 한다. 이에 대해 문인(門人)들 역시 궁금했던 모양이다. 무슨 뜻이냐고 묻자, 증자가 답한다. "선생의 도는 충과 서일뿐이다.(夫子之道, 忠恕而已矣.)" 하나로 꿰뚫은 공자의 도가 충과 서라는 말이다. 충서(忠恕)는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나를 미루어 남을 생각하는 것이다. 일이관지가 무엇이라는 답이 아니라 일이관지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이라는 답이다.
옥을 꿰어 보배로 만드는 것과 하나로 열을 아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어떻게 보면 별 의미 없는 일로 너스레 떠는 것은 아닐까? 뜬금없다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것은 아니다. 시대의 변화, 관점의 차이를 말하려는 것이다. 총명함보다 산적해 있는 정보를 하나로 엮어 내는 지혜가 중요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몰라서 못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정보의 바다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누가 그 정보를 잘 활용하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또 하나 중대한 변화가 있다. 말은 엎어진 물과 같아 한번 뱉으면 거둬들이기 어렵다. 당연히 말이 많다보면 자가당착(自家撞着), 자기모순(自己矛盾)이란 함정에 빠지기 쉽다.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아니다. 예전엔 기억에 의존했고, 지금은 문자로 영상으로 실체가 존재한다. 무한정 사이버 공간에 머물고 떠돈다. 시대 변화에 둔감하여 함부로 내뱉고 그에 발목 잡힌 무수한 사례를 보고 있지 않는가?
산적한 정보를 잘 꿰어 보배로 만들고, 그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풀어내 구현해야 한다. 사언행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머리에서 마음까지 한자도 채 안되지만 다다르기에 멀기만 하다. 그 마음이 발로 가기는 더욱 어렵다. 하지만, 하나가 될 때 자신은 물론 서로가 행복하다.
계묘년 새해, 열심히 성찰하여 꿰고, 장중하게 처신하자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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