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디세이] 약탈 문화재의 자진 반환과 합법 환수의 새시대

  • 오피니언
  • 시사오디세이

[시사오디세이] 약탈 문화재의 자진 반환과 합법 환수의 새시대

박양진 충남대 고고학과 교수

  • 승인 2022-12-26 08:45
  • 윤희진 기자윤희진 기자
박양진 충남대 고고학과 교수(시사오디세이)
박양진 교수
서양 문명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의 중심지에는 아크로폴리스가 있다. 신전과 극장, 광장이 밀집된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기원전 5세기에 세워진 아테나 여신을 모시는 파르테논 신전이다. 건물 재료, 구조와 형식, 조각 장식 등에서 서양 공공건축물의 고전적 원형으로 인식된다.

1799년 오토만 제국의 영국 대사로 부임한 제7대 엘진 공작 토마스 브루스는 당시 오토만 지배하에 있던 아테네의 여러 곳에서 문화재를 약탈하는데, 파르테논 신전을 장식한 뛰어난 조각의 대부분을 1803년 영국으로 무단 방출했다. 바이런 경을 비롯한 당대 영국인들도 도둑질이라고 비난했던 이 조각품을 영국박물관이 구입했고 이후 박물관의 대표적 전시품으로 자리 잡으면서 '엘진 마블스'로 불리고 있다.

이후 그리스 정부는 엘진 대리석 조각의 반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으며 현재 영국 국민의 여론도 대부분 이에 동의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진전이 없다. 올해 12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 박물관이 소장한 파르테논 신전 조각품 3점을 아무 조건 없이 그리스에 반환하기로 한 결정이 영국박물관의 엘진 대리석 반환 전망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한다.

엘진 대리석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베닌 왕국에서 주로 13∼16세기에 제작돼 왕궁을 장식했던 수천 점의 청동과 황동, 상아, 목제 장식과 조각품이 있다. 19세기말 영국군이 베닌 왕궁을 공격하면서 불법으로 약탈한 전리품이 된 후 장교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거나 영국 정부가 직접 판매하면서 영국박물관과 베를린 민속박물관을 비롯한 전 세계의 박물관으로 퍼져나갔다. 베닌 문화재는 뛰어난 수준의 아프리카의 문화와 조각을 서양에서 본격적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긴 했지만 그 불법적인 약탈 과정은 전혀 합리화될 수 없다.



2007년 세계에 퍼져있는 베닌 문화재의 반환과 이의 영구적 전시를 위한 베닌 박물관의 건립을 목표로 한 '베닌 대화 그룹'이 구성됐고 이후 베닌 유물의 반환과 환수가 더디지만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독일 정부는 2021년 공립박물관이 소장한 모든 베닌 문화재의 반환을 약속했고 영국 성공회교회와 캠브리지 대학,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스미소니언 박물관 등도 자진 반환에 동참하면서 상당수의 유물이 이미 환수됐다.

이제 서양의 크고 작은 유명 박물관들이 세계 각지에서 불법적으로 약탈된 유물을 경쟁적으로 구입해 소장하고 전시하던 시대는 끝났다. 오히려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불법으로 약탈된 것으로 확인된 문화재의 경우 자발적으로 반환하는 것이 이제 새로운 대세가 되고 있다. 이러한 환경 변화의 단초는 1970년 불법 약탈 문화재의 거래와 소유권의 이전을 금지한 유네스코 협약의 제정과 각국의 승인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뉴욕 타임스는 미국 박물관들의 불법 약탈 문화재의 반환 또는 환수 사례에 대하여 정리 보도하면서 이른바 '인디애나 존스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우리나라도 제국주의의 침탈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문화재가 불법으로 약탈·반출된 바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95,000여 점을 비롯해 해외에 소재하는 우리나라 문화재는 확인된 것만 21만여 점이 넘는데, 반출과 소장 과정이 불투명한 것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그 가운데 반환된 건 극소수에 불과하다. 유네스코 협약이 1970년 이전의 불법적 행위까지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지만, 해외소재 우리 문화재 가운데 약탈과 도굴 등 불법적 반출 과정을 객관적으로 증명한다면 그만큼 합법 반환 또는 환수의 가능성은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의 박물관도 일부 불법 약탈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중국, 북한, 동남아시아 등지의 문화재가 불법으로 밀수되어 거래되면서 일부 공공박물관의 수장고에까지 들어가고 있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오타니 유물은 중국 신장지역의 유적과 동굴 사원에서 일본탐사대가 1900년대 약탈했던 문화재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가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화재의 적절하고 윤리적이며 장기적인 처리 방안이 무엇인지 우리도 이제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박양진 충남대 고고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고교 당일 급식파업에 학생 단축수업 '파장'
  2. 대전 오월드서 에어컨 실외기 설치 작업자 추락해 사망
  3. 열악했던 대전 여성노숙인 쉼터…지원 손길로 '확 달라졌다'
  4. "뿌리부터 첨단산업까지… 지역과 함께 혁신·성장하는 대학"
  5. 대전 중구 교육부 평생학습도시 신규 선정 '중구가 대학, 온마을이 캠퍼스'
  1. 대전교사들 "학교 CCTV 의무화, 사건 예방에 도움 안돼" 의무화 입법에 반발
  2. 계룡산성 道지정문화재 등록 5년째 '보류'…성벽과 기와 무너지고 흩어져
  3. 대전 금고동 주민들 "매립장·하수처리 공사장 먼지에 농사 망칠판" 호소
  4. 사랑의 재활용 나눔장터 ‘북적북적’
  5.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

헤드라인 뉴스


[르포] 4·2 재보궐 현장…"국민통합 민주주의 실현해야"

[르포] 4·2 재보궐 현장…"국민통합 민주주의 실현해야"

"탄핵정국 속 두 쪽으로 갈라진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고 민주주의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4·2 재보궐선거 본 투표 당일인 2일 시의원을 뽑는 대전 유성구 주민에게선 사뭇 비장함이 느껴졌다. '민주주의의 꽃' 선거를 통해 주권재민(主權在民) 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발현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저마다 투표소로 향한 것이다. 오전 10시에 방문한 유성구제2선거구의 온천2동 제6투표소 대전어은중학교는 다소 한산한 풍경이었다. 투표 시작 후 4시간이 흘렀지만 누적 투표수는 고작 200표 남짓에 불과했다. 낮은 투표율을 짐..

`눈덩이 가계 빚` 1인당 가계 빚 9600만 원 육박
'눈덩이 가계 빚' 1인당 가계 빚 9600만 원 육박

국내 가계대출 차주의 1인당 평균 대출 잔액이 약 9500여 만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40대 차주의 평균 대출 잔액은 1억 1073만 원으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박성훈 의원이 한국은행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말 기준 가계대출 차주의 1인당 평균 대출 잔액은 9553만 원으로 조사됐다. 이는 관련 통계가 작성된 지난 2012년 이후 역대 최고 수준이다. 1인당 대출 잔액은 지난 2023년 2분기 말(9332만 원) 이후 6분기 연속 증가했다. 1년 전인 2..

요즘 뜨는 대전 역주행 핫플레이스는 어디?... 동구 가오중, 시청역6번출구 등
요즘 뜨는 대전 역주행 핫플레이스는 어디?... 동구 가오중, 시청역6번출구 등

숨겨진 명곡이 재조명 받는다. 1990년대 옷 스타일도 다시금 유행이 돌아오기도 한다. 이를 이른바 '역주행'이라 한다. 단순히 음악과 옷에 국한되지 않는다. 상권은 침체된 분위기를 되살려 재차 살아난다. 신규 분양이 되며 세대 수 상승에 인구가 늘기도 하고, 옛 정취와 향수가 소비자를 끌어모으기도 한다. 원도심과 신도시 경계를 가리지 않는다. 다시금 상권이 살아나는 기미를 보이는 역주행 상권이 지역에서 다시금 뜨고 있다. 여러 업종이 새롭게 생기고, 뒤섞여 소비자를 불러 모으며 재차 발전한다. 이미 유명한 상권은 자영업자에게 비싼..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친구들과 즐거운 숲 체험 친구들과 즐거운 숲 체험

  • 한산한 투표소 한산한 투표소

  •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앞 ‘파면VS복귀’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앞 ‘파면VS복귀’

  •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