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양진 교수 |
1799년 오토만 제국의 영국 대사로 부임한 제7대 엘진 공작 토마스 브루스는 당시 오토만 지배하에 있던 아테네의 여러 곳에서 문화재를 약탈하는데, 파르테논 신전을 장식한 뛰어난 조각의 대부분을 1803년 영국으로 무단 방출했다. 바이런 경을 비롯한 당대 영국인들도 도둑질이라고 비난했던 이 조각품을 영국박물관이 구입했고 이후 박물관의 대표적 전시품으로 자리 잡으면서 '엘진 마블스'로 불리고 있다.
이후 그리스 정부는 엘진 대리석 조각의 반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으며 현재 영국 국민의 여론도 대부분 이에 동의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진전이 없다. 올해 12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 박물관이 소장한 파르테논 신전 조각품 3점을 아무 조건 없이 그리스에 반환하기로 한 결정이 영국박물관의 엘진 대리석 반환 전망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한다.
엘진 대리석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베닌 왕국에서 주로 13∼16세기에 제작돼 왕궁을 장식했던 수천 점의 청동과 황동, 상아, 목제 장식과 조각품이 있다. 19세기말 영국군이 베닌 왕궁을 공격하면서 불법으로 약탈한 전리품이 된 후 장교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거나 영국 정부가 직접 판매하면서 영국박물관과 베를린 민속박물관을 비롯한 전 세계의 박물관으로 퍼져나갔다. 베닌 문화재는 뛰어난 수준의 아프리카의 문화와 조각을 서양에서 본격적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긴 했지만 그 불법적인 약탈 과정은 전혀 합리화될 수 없다.
2007년 세계에 퍼져있는 베닌 문화재의 반환과 이의 영구적 전시를 위한 베닌 박물관의 건립을 목표로 한 '베닌 대화 그룹'이 구성됐고 이후 베닌 유물의 반환과 환수가 더디지만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독일 정부는 2021년 공립박물관이 소장한 모든 베닌 문화재의 반환을 약속했고 영국 성공회교회와 캠브리지 대학,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스미소니언 박물관 등도 자진 반환에 동참하면서 상당수의 유물이 이미 환수됐다.
이제 서양의 크고 작은 유명 박물관들이 세계 각지에서 불법적으로 약탈된 유물을 경쟁적으로 구입해 소장하고 전시하던 시대는 끝났다. 오히려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불법으로 약탈된 것으로 확인된 문화재의 경우 자발적으로 반환하는 것이 이제 새로운 대세가 되고 있다. 이러한 환경 변화의 단초는 1970년 불법 약탈 문화재의 거래와 소유권의 이전을 금지한 유네스코 협약의 제정과 각국의 승인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뉴욕 타임스는 미국 박물관들의 불법 약탈 문화재의 반환 또는 환수 사례에 대하여 정리 보도하면서 이른바 '인디애나 존스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우리나라도 제국주의의 침탈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문화재가 불법으로 약탈·반출된 바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95,000여 점을 비롯해 해외에 소재하는 우리나라 문화재는 확인된 것만 21만여 점이 넘는데, 반출과 소장 과정이 불투명한 것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그 가운데 반환된 건 극소수에 불과하다. 유네스코 협약이 1970년 이전의 불법적 행위까지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지만, 해외소재 우리 문화재 가운데 약탈과 도굴 등 불법적 반출 과정을 객관적으로 증명한다면 그만큼 합법 반환 또는 환수의 가능성은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의 박물관도 일부 불법 약탈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중국, 북한, 동남아시아 등지의 문화재가 불법으로 밀수되어 거래되면서 일부 공공박물관의 수장고에까지 들어가고 있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오타니 유물은 중국 신장지역의 유적과 동굴 사원에서 일본탐사대가 1900년대 약탈했던 문화재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가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화재의 적절하고 윤리적이며 장기적인 처리 방안이 무엇인지 우리도 이제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박양진 충남대 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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