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이조와 예조판서를 지낸 문장가 이식(李植, 1584 ~ 1647)의 <송죽문답(松竹問答)>이다.
솔이 대에게 말을 건다.(松問竹)
눈보라 산골 가득해도(風雪滿山谷)
나는 강직하게 머리 들고(吾能守强項)
부러질망정 굽히지 않는다오.(可折不可曲)
대가 솔에게 대답한다.(竹答松)
고고할수록 부러지기 쉽다네(高高易?折)
다만 청춘의 푸르름 지키며(但守靑春色)
머리 숙여 눈보라 마주한다오.(低頭任風雪)
소나무와 대나무 모두 절개와 지조, 고결함의 상징이다. 사시절 푸르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나무는 곧음을 더한다. 대나무는 사군자의 하나로, 소나무는 십군자 중 하나로 꼽는다. 십군자는 매·란·국·죽 사군자에 모란, 목련, 소나무, 연, 파초, 포도가 더해진 것이다. 서로 자신의 자태를 뽐낸다. 머리 세우는 것이 좋을까? 숙이는 것이 좋을까?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 그만이지만, 선악이 따져져야 되는 경우도 있다. 그 구분의 기준은 집단지성일 것이다. 그 집단지성이 막상막하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물론, 대립이나 충돌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생성과 소멸, 운행 원리 아니겠는가?
하지만, 지나친 극단적 대치 세태에 늘 놀라곤 한다. 같은 사안에 대하여 어찌 저리 다르게 서술 할 수 있을까?
각각의 사물에 이치가 있다고 본 주희(朱熹)나, 선악을 구분할 줄 아는 마음이 천리라는 왕수인(王守仁)의 주장을 범인이 논하기는 어렵다. 사물마다 본래의 성이 있고, 그 성이 마음에 의해 천차만별로 규명된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같은 정보의 바다, 가치의 바다에서는 스스로 추스를 기준 선택이 애매모호하다. 다만, 가치판단 기준이 보다 높고 넓어야 한다. 한번쯤 돌아보고 되짚어 봐야 한다. 부단히 공부하고 성찰해야 한다. 그를 통해 공동선이랄까?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세계에 더 부합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아니면 그저 바람에 맡겨야 한다. 바람이 우릴 유혹하지 않는가? 이인승 시인의 시 <풍설(風雪)>이다.
차가운 날씨가
소낙비 먹구름을
엄동설한이 마구 때려
눈송이로 환생시킨다.
얇고 섬세하게
하이얀 눈송이 털이
바람따라 춤을 추며 날리면
나도 그 속에 묻힌다.
머리에도 앉고
얼굴에 와서 만지다 가고
온몸에도 앉았다가
사르르 뒹굴어 떨어진다.
바람에 따라
자연스러운 날림은
나를 불러내는 연인
그 눈송이 속에 빠진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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