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디세이] 불편함의 힘

  • 오피니언
  • 시사오디세이

[시사오디세이] 불편함의 힘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승인 2022-12-12 08:38
  • 윤희진 기자윤희진 기자
이승선 교수
이승선 교수
대전의 어떤 언론인은 끝 여름의 어느 날, 1,500자 칼럼을 쓰기 위해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에 갔다. 법정 안에서 어떤 기업의 전 대표였던 아무개의 형사재판이 열렸다. 그 아무개에게 닦달당한 사람들은 법정 바깥의 뙤약볕 아래 서 있었다. 천안지원에 다녀온 언론인은 칼럼에 '새까맣게 그을린 노동자들의 얼굴은 지쳐 보였다'고 썼다. 발품을 팔아 현장에 간 기자의 불편함이 없었더라면 "뙤약볕", "새까맣게", "그을린", "지쳐 보였다"는 생생한 뉴스 언어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천안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따위의 덤을 독자들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불편함을 무릅쓴 그 언론인은 기어이 '사람의 얼굴'을 보고 왔다. 그의 칼럼에서 사람 냄새가 풀풀 나는 이유다.

"선생은 학생을 선택할 수 없다"는 명제가 공교육 현장에서 외면당할 때가 있다. '골치 아픈 문제아'로 낙인찍힌 아이들을 은밀히 방출하려는 학교와 쫓겨난 아이들을 필사적으로 들이지 않으려는 학교 간의 물밑 싸움에 아이들이 멍든다. '골치 아픈 문제아'를 학급에 받지 않으려고 용쓰던 담임선생들은 과연 사라지고 없어졌는가. 자신이 개설한 세미나를 듣겠다고 수강 신청한 학생에게 교수가 다른 선생의 교과목을 수강하라고 안내하기도 한다. 친절한 안내 서비스로 포장했으나 혹시 '논쟁 좋아하고 탐구심 강한' 불편한 학생을 자기 세미나에 들이지 않으려는 발상의 발로는 아닌가. 학년 학기 초. 다른 선생님들이 외면하고 회피하는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묵묵히 받아들이는 선생님들이 있다. "선생에게는 학생 선택권이 없다"라는 신념을 실행하는 선생님들이다. 불편함을 교사의 숙명이자 보람이라고 여기는 분들 덕분에 교육의 가치가 빛난다.

1971년 6월 13일 뉴욕타임즈는 미국 국방성 1급 기밀문서였던 '펜타곤 페이퍼'를 보도했다. 정부가 은폐한 베트남전의 진실을 국민은 알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형사처벌을 염려한 자문 변호사들이 보도를 만류했다. 발행인과 편집국은 진실을 알리는 '불편한 선택'을 했다. 사흘째 보도를 하던 중 법원의 보도 중지 가처분 명령이 나왔다. 보도는 중단되었다.

진실은 숨겨진 송곳과 같아서 진실을 알리려는 언론을 막을 수 없었다. 이번엔 경쟁지였던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했다. 사내 변호사들이 만류했으나 워싱턴포스트 발행인과 편집국 역시 고뇌 속에서 '불편한 선택'을 했다. 6월 18일 보도 당일, 보도를 중지하라는 법원 명령이 나왔다. 6월 30일 미연방대법원은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의 자유가 더 소중하다며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의 손을 들어줬다. 용기 있게 진실을 보도한 두 신문의 불편한 선택이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 토대를 굳건하게 닦았다. 취재 현장에서 치열한 경쟁자로 살아가는 언론이 진실 보도를 위해 펼쳐 보인 아름다운 연대와 우정이었다.



MBC가 대통령 전용기에 탑승하지 못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해 덜 알려진 사실도 있다. 대통령실이 MBC의 취재와 보도 행태를 문제 삼아 전용기 탑승을 배제한 건 민주주의 규범과 헌법이 보장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며 한겨레, 경향신문은 전용기 탑승을 거부했다. 두 신문은 전용기에 탑승해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순방을 취재하는 쉬운 길을 취하지 않았다. 대신 민항기로 캄보디아 프놈펜에 가서 대통령과 각국 정상의 외교 활동을 취재하고 다시 민항기를 갈아타고 인도네시아 발리로 이동하는 불편을 선택했다. 인도네시아에서 귀국하는 여정도 불편한 개별 민항기였다.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은 두 신문사 취재 기자와 편집국에 불편했을 것이다. 전용기에서 취재할 수 있었을지 모를 정보를 놓쳤을 수 있다. 순방 외교의 성과들을 제때 획득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먹을 각오'를 만천하에 공언한 것이다.

많은 독자가 두 신문의 불편한 선택에 박수를 보냈다고 들었다. 독자들의 알 권리와 민주주의를 위해 현장의 언론인들이 어떤 불편한 선택을 하고 얼마나 어렵게 정보를 취재해 보도하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줬다고 평가한 것이다. 언론이 불편을 무릅쓰고 진실을 보도하려는 원칙에 충실할 때 독자들 역시 언제든지 한발 양보할 수 있다. 소식이 조금 늦는다거나 정보량이 조금 부족한들 어떠랴. 언론과 독자의 아름다운 동행이다. 언론 현장에서 발견하는 불편함의 힘이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학대 마음 상처는 나았을까… 연명치료 아이 결국 무연고 장례
  2. 원금보장·고수익에 현혹…대전서도 투자리딩 사기 피해 잇달아 '주의'
  3. 김정겸 충남대 총장 "구성원 협의통해 글로컬 방향 제시… 통합은 긴 호흡으로 준비"
  4. [대전미술 아카이브] 1970년대 대전미술의 활동 '제22회 국전 대전 전시'
  5. 대통령실지역기자단, 홍철호 정무수석 ‘무례 발언’ 강력 비판
  1. 20년 새 달라진 교사들의 교직 인식… 스트레스 1위 '학생 위반행위, 학부모 항의·소란'
  2. [대전다문화] 헌혈을 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3. [사설] '출연연 정년 65세 연장법안' 처리돼야
  4. [대전다문화] 여러 나라의 전화 받을 때의 표현 알아보기
  5. [대전다문화] 달라서 좋아? 달라도 좋아!

헤드라인 뉴스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시와 충남도가 행정구역 통합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장우 대전시장과 김태흠 충남지사, 조원휘 대전시의회 의장, 홍성현 충남도의회 의장은 21일 옛 충남도청사에서 대전시와 충남도를 통합한 '통합 지방자치단체'출범 추진을 위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했다. 대전시와 충남도는 수도권 일극 체제 극복, 지방소멸 방지를 위해 충청권 행정구역 통합 추진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대를 갖고 뜻을 모아왔으며, 이번 공동 선언을 통해 통합 논의를 본격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공동 선언문을 통해 두 시·도는 통합 지방자치단체를 설치하기 위한 특별..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