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한 대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것은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다고 한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외로움이 반감하거니와 한 번이라도 더 웃을 일도 많아진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치매 예방에도 좋은 효과가 있다고도 알려져 있다. 척박한 현실에서 웃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정신 건강에 매우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반려동물을 대하는 태도에는 선뜻 이해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동물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일이다. 이 소유감과 분리하기 어려운데, 이런 의식을 갖게 되면 소위 반려동물의 자존감이랄까 자율성은 사라지게 된다. 하기야 자식조차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보면, 동물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전혀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경제권이나 양육권이 있다고 해서 자식이나 반려동물이 소유물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이런 소유욕이 어떤 극한에 도달할 때이다. 가끔 우리는 동물을 학대하거나 유기되는 모습들을 보도를 통해서 보게 된다.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못된 것이지만, 그것이 확대되어 이들을 학대하거나 버리는 일이야말로 인간들만이 가진 이기주의의 극한적인 모습일 것이다.
얼마 전 유기된 고양이와 마주한 적이 있다. 수업이 없는 날, 정신적 긴장 완화와 건강을 위해 가끔 앞산에 산책하러 나간다. 하루는 횡단 보도를 건너자마자 고양이 한 마리가 달려왔다. 다가와서는 고개를 내 다리에 비비는가 하면, 누워서 배를 드러내고 애교를 부린다. 고양이가 이렇게 애교 부리는 것을 처음 보았거니와 이 모습은 강아지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평소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이를 보고 이들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어떻든 한때 인간의 사랑을 받았던 고양이는 이제 인간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그런에도 고양이는 자신을 버린 인간이 그리워 이렇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한두 번 반복되다 보니 그 고양이에 대한 애처로움이 생겨났다. 날씨는 추워지고 먹이는 제대로 먹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편의점에서 고양이 간식을 사서 들고 갔다. 고양이는 다시 나를 보고 달려왔고, 간식을 주니 맛있게 먹었다.
집에 말하니 고양이를 데려와 기르자고 한다. 반려견 두 마리가 있어서 좀 주저되긴 했지만, 그래도 데리고 오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고양이가 항상 나오던 곳에 다시 갔다. "야옹아!"하고 불렀다. 하지만 고양이는 나오지 않았다. 추워서 얼어 죽은 것일까. 아니면 굶주려 죽은 것일까. 이후 이 버려진 고양이를 만나지 못했다. 아마도 고양이는 어느 마지막 순간에 인간을 무척이나 원망했으리라.
근대 사회가 시작된 이후, 정확하게 말하면 중세의 영원 사회가 무너진 이후,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을 지배하려 들었다. 그 목적은 물론 인간 자신의 한없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였다. 그것이 인간과 자연의 이분화된 사회이다. 그러나 욕망에 물든 인간이 이를 마음껏 채웠다고 해서 행복해진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러했다면, 인간들은 유토피아를 그리워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도래하지 않은 낙원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 유토피아를 상실한 것은 자연에 대한 배반에 그 원인이 있다. 배신은 오직 인간들만이 가진 고유 권한이다. 자연(고양이)은 인간을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이랄까 기대에 맞지 않으면 과감하게 떠나는 것이다. 유기 동물이 야생화되어서 인간에게 돌아오지 않는 것은 인간의 그러한 배신행위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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