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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최근 금강하구 백강전투와 진포대첩이 펼쳐진 장항읍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돌아보는 세미나를 개최했다. |
내륙에서 바다로 나아갈 때나 금강을 통해 내륙으로 들어올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 장항 앞바다에서 백제 부흥군과 왜국 연합군이 펼친 백강구 전투부터 장암진성의 의미를 돌아보는 세미나가 개최됐다. 왜국의 백제구원군은 신라 공격을 목표로 파병되었으나 금강 하구 해역에서 당나라 수군과 맞붙었고,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계기가 됐다는 분석이다.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은 서천군과 함께 12월 9일 서천문화원에서 '백강전투와 진포대첩으로 보는 장항의 역사' 학술세미나를 5진행했다. 공주와 부여는 물론이고 대전 신탄진까지 이어지는 금강 뱃길의 입구인 서천군 장항읍의 역사적 정체성을 살피고, 백제말 이곳에서 펼쳐진 백강전투와 고려말 진포대첩이 남긴 문화유산을 발굴하기 위해 마련됐다.
나행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백강구 전쟁와 백제 말기 한일관계'를 통해 "왜국의 구원군은 당과의 결전을 전제로 하지 않고, 신라와의 전투만을 상정한 파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라며 "백강구에 늦게 도착한 왜의 수군이 기상 조건이나 조수 등의 고려 없이 배를 붙여 창과 칼로 승부를 결정지으려 하면서 당나라 수군의 화공에 패배했다"고 설명했다. 나 교수는 "당과 일본, 통일신라라는 한·중·일 삼국체제의 원형이 형성되었고, 일본 내에서는 불교문화가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고 역사적 의미를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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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하구의 문화 학술세미나에서 주요 발표자와 토론자가 연구를 설명하고 있다. 윤용혁 공주대 명예교수, 나행주 건국대 교수, 이영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이찬희 공주대 교수.(사진 왼쪽부터) |
이어 한국방송통신대 일본학과 이영 교수는 '진포구 전투의 의의'를 통해 1380년(고려 우왕 6년) 8월 왜구의 500척의 대 선단이 금강 하구인 진포구(현 장항읍)에 정박했다가 최무선(1325~1395) 등이 이끄는 고려 수군의 최초의 화포 공격을 받고 전소한 사건을 조명했다. 흔히 진포대첩으로 불려왔던 이 전투의 현장이 충남 서천의 장항읍 일대인가, 아니면 금강의 남쪽인 군산시 일대인가 논란이 이어졌다. 이 교수는 장항읍 일대는 북서풍을 막아주고 일정한 수심을 유지하는 장소로써 진포대첩 현장은 장항읍 장암리 일대라고 전제했다. 이 교수는 "고려 때 왜구는 대규모 선단을 이뤄 서해안으로 상륙해 충남과 호남의 곡창지대를 수시로 약탈함으로써 '농사방해·납치-기근초래-국가 재정고갈'의 악순환을 초래했다"라며 "처음 화포를 사용한 진포구 전투 승리를 계기로 한반도 연안에 배를 정박한 채 내륙을 오랫동안 약탈하는 왜구를 종식시키는 역사적 계기가 됐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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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군 장항읍 장암진성터에서 바라본 앞바다. 장암진성은 옛 장항제련소 전망산까지 이어지는 규모였다. |
서정석 공주대 문화재보존과학과 교수는 적을 막아내는 첫 길목으로 인식된 서천 장항에 축조된 장암진성을 조사하고 기벌포와 가림성이 갖는 전략적 중요성을 조명했고, 이찬희 공주대 교수는 옛 장항제련소의 전망산과 장안진성 주변에서 백제 때 백강전투, 기벌포 전투 및 진포해전 등 여러 시대에 걸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중심에 장암진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윤용혁 공주대 명예교수의 사회로 허인욱 한남대 교수와 박수환 서천향토문화연구회 대표 등이 참여한 토론이 이어졌다.
임병안·서천=나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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