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의미가 조금 다르지만, 과거 우리의 학습방법 중 하나에 모방이 있다. 임서(臨書), 임화(臨?) 등 보고 쓰거나 보고 그리는 것으로 수련한다. 물론 겉모습만 흉내 내는 것은 아니다. 내용의 이해, 내면 또는 감성 모방을 목표로 한다. 겉으로 들어난 것만 흉내 내기도 쉽지 않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붓을 사용하는 필법, 먹을 사용하는 묵법 등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어찌어찌하여 터득했다고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학습 과정이니 오히려 장한 일이다. 모작이 진품보다 예술성이 더 뛰어난 경우도 있다. 청출어람(靑出於藍) 아닌가? 그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방이 짝퉁이 될 때 문제가 된다. 가짜가 진품으로 둔갑하기도 하고, 진품이 가짜로 푸대접 받기도 한다.
짝퉁이 왜 생길까? 거짓이 왜 만들어질까? 우리 마음에 숨어있는 허영, 과시욕 때문이다. 작가는 창작으로 보지만, 수요자는 상품으로 본다. 미적 즐거움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품 가치로 견준다. 작품에서 얻는 쾌감이 아니라, 소유에서 오는 쾌감을 중시한다.
자본주의 사회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부족한 우리 속성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러했던 것이 그 증거이다. 예술을 천시했던 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조선 초기, 예술 활동을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간주, 낙관도 하지 않았다. 판단이 유보된 작품을 포함, 전 아무개 작품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 그러한 것이다. 서명은 물론, 그린 장소, 제작일자, 화제 등 아무것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후세에 낙관한 후낙관도 많다. 괜스레 손을 대 위작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대놓고 위작을 만들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 18권 현종8년(1667) 10월 16일 4번째 기사에 나오는 얘기다. "요즈음 작상(爵賞)이 참람되어 조정의 상전(常典)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민간에 흩어져 있는 열성(列聖)들의 어필(御筆)을 아래에서 올리면 문득 상을 내려 직을 제수하라고 명하거나 자급을 더 주라고 명합니다. 이 때문에 은상을 바라는 자들이 몹시 교활하게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완평 부수(完平副守) 홍(洪)은 고 금양위(錦陽尉) 박미(朴?)의 집에 소장되어 있던 선조(宣祖)께서 그린 대나무 병풍을 어떤 선비 집에서 빌려다 놓았다고 듣고는 속임수를 써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 다음 화가를 시켜서 모사하게 하였는데, 화본(畵本)에 오래된 것처럼 색을 물들여서 비슷하게 하여 병풍에 있는 것을 바꾸어 붙여 본주인에게 돌려주고, 진적(眞跡)은 위에 올렸습니다. 감히 도둑질을 하여 작상(爵賞)의 은혜를 바랐는 바, 군부를 속인 정상이 몹시 놀랍습니다. 완평 부수 홍에게 새로 내린 가자를 도로 거두고, 잡아다가 신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심유(沈攸) 등의 주청에 따라 왕이 홍에게 벌을 내렸다는 기사다. 얼핏 보면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다. 조금만 더 깊게 음미해 보라. 위작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위조 기술도 상당 수준에 올라있었다는 대변이다. 손영옥의 <조선의 그림 수집가들>에 의하면 어필이나 어화 위작이 가장 많았다고 전한다. 당시로서는 허영심 충족에 가장 적합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리라.
이중섭, 천경자, 이우환 화백의 작품에 대한 진위 논란이 지속되고 있고, 예술계 전반에 걸쳐 짝퉁, 표절, 위작, 왜곡 등이 시비 거리로 끊임없이 등장한다. 시장이 과열되다 보니 짝퉁이 판치고, 버젓이 짝퉁시장까지 형성되어있는 실정이다.
그 누가 짝퉁사회를 원하랴? 가짜를 몰아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사물의 가치나 진위 판정할 수 있는 감식안이다. 감정가의 문을 연 오세창(吳世昌, 1864.7.15. ~ 1953.4.16. 서화가, 독립운동가)은 작품의 외형뿐만 아니라 작가의 창작의도, 작품 및 작가에 대한 배경 지식 등 인문학적 이해가 감식의 토대라 일러준다. 안목을 갖기 위해 엄청난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둘째는 보다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는 것이다. 얼마 전에 안초근 시인의 말을 소개한 적이 있다. "나는 명품이 필요 없다. 내가 명품이기 때문이다." 소유, 경제적 가치, 어쩌면 모두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거짓이 만연하고 있다. 너나없이 중대한 과실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논어 위령공편 글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잘못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잘못이다.(過而不改, 是謂過矣.)"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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