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 신경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봐주면 좋으련만,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 이상을 상상하고 창작하는 능력이 있다. 선의로 사용하면 그보다 값진 것이 어디 있으랴, 반대로 사용하면 더없이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시기질투도 나쁘게 사용되는 것 중 하나다. 남이 잘되는 것을 미워하고, 우월한 사람을 증오한다. 각종 자료 뒤적이다보면 고금에 그런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한석봉(石峯 韓濩, 1543 ~ 1605, 조선 문신, 서예가)은 명실상부한 서예대가이다. 글씨가 참 아름답다. 그 덕분에 문서 작성과 정리에 종사하는 사자관(寫字官), 서사관(書寫官)으로 일한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5세에 조부까지 잃어 살림이 빈곤하였다. 손에 물 찍어, 항아리나 돌 위에 글씨 연습을 한다. 부단히 노력한 결과, 어려운 환경에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천부적 재질에 노력이 더해진 것이다. 글씨만 잘 쓴 것이 아니다. 영계 신희남(瀯溪 愼喜男),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휴암 백인걸(休庵 白仁傑)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에도 밝았다.
글씨가 너무너무 훌륭하다보니 모두가 따라했다. 국가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 특유의 서체로 자리하게 된다. 사자관체(寫字官體)라 폄하하기도 하지만, 본래부터 그런 체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독창적이고 강건하며, 호쾌하고 우아하다. 그가 쓴 천자문은 서예의 교과서가 되어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성난 사자가 바위를 갉아내고, 목마른 천리마가 내로 달리는 것같이 힘차다."(왕세정), "석봉의 글씨는 능히 왕우군(王右軍)·안진경(顔眞卿)과 어깨를 겨눌 만하다."(주지번), "기(奇)하고 장(壯))하기 한량없는 글씨"(선조) 등 많은 사람으로부터 찬사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반면에 시기질투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성장과정이나 신분이 도마 위에 오른다. 집안이 천하다. 생활수준이 낮다거나, 기껏해야 사자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훼했다. 글씨도 창의적이지 못하다거나 예술적이지 못하고 속되다 주장 한다.
당연히 제왕이었던 선조의 총애를 받는다. 그것도 시기질투의 대상이다. 마음씨가 과격하고 어리석다거나 일처리를 잘못한다, 자리만 차지하고 일은 모두 아전에 맡겼다고 탄핵한다. 그때마다 석봉을 신뢰하던 선조가 나서 무마하였다. 1604년 공신녹권 필사를 맡았다. 일을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하고 고의로 글씨를 잘 못 썼다며 사헌부에서 탄핵한다. 얼마나 심했던지 결국은 파직시킨다. 1년여 만인 1605년 7월 사망한다. 파직이 사망 원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요즈음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본다. 시기질투로 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구나 치열한 삶의 과정을 간직하고 있다. 백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최선 아닐까? 돕지는 못하더라도 가로막지 않은 것이 순리 아닐까? 알몸으로 돌아가 부둥켜 안자.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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