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순리와 시기질투, 한석봉(韓石峯)

  • 오피니언
  • 여론광장

[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순리와 시기질투, 한석봉(韓石峯)

양동길/시인, 수필가

  • 승인 2022-12-02 09:46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낙엽이 나뒹구는 숲길을 걷는다. 고운 모습에 이끌려 단풍잎 주워 들여다본다.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너나없이 크고 작은 상처가 아로새겨져있다. 훈장 같은 치열한 삶의 흔적이다. 한 해 동안 나무를 지키고 키웠다. 하지만, 때가되면 자유롭게 새 해 맞이하도록 미련 없이 손을 놓는다. 순환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다. 나무는 어떠한가? 홀라당 벗어 재끼고 북풍한설과 맞선다. 말 그대로 나목이다.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다. 신경림(본명 申應植, 1935 ~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시인의 시 한편 감상 하자.

나목

- 신경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봐주면 좋으련만,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 이상을 상상하고 창작하는 능력이 있다. 선의로 사용하면 그보다 값진 것이 어디 있으랴, 반대로 사용하면 더없이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시기질투도 나쁘게 사용되는 것 중 하나다. 남이 잘되는 것을 미워하고, 우월한 사람을 증오한다. 각종 자료 뒤적이다보면 고금에 그런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한석봉(石峯 韓濩, 1543 ~ 1605, 조선 문신, 서예가)은 명실상부한 서예대가이다. 글씨가 참 아름답다. 그 덕분에 문서 작성과 정리에 종사하는 사자관(寫字官), 서사관(書寫官)으로 일한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5세에 조부까지 잃어 살림이 빈곤하였다. 손에 물 찍어, 항아리나 돌 위에 글씨 연습을 한다. 부단히 노력한 결과, 어려운 환경에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천부적 재질에 노력이 더해진 것이다. 글씨만 잘 쓴 것이 아니다. 영계 신희남(瀯溪 愼喜男),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휴암 백인걸(休庵 白仁傑)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에도 밝았다.

글씨가 너무너무 훌륭하다보니 모두가 따라했다. 국가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 특유의 서체로 자리하게 된다. 사자관체(寫字官體)라 폄하하기도 하지만, 본래부터 그런 체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독창적이고 강건하며, 호쾌하고 우아하다. 그가 쓴 천자문은 서예의 교과서가 되어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성난 사자가 바위를 갉아내고, 목마른 천리마가 내로 달리는 것같이 힘차다."(왕세정), "석봉의 글씨는 능히 왕우군(王右軍)·안진경(顔眞卿)과 어깨를 겨눌 만하다."(주지번), "기(奇)하고 장(壯))하기 한량없는 글씨"(선조) 등 많은 사람으로부터 찬사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반면에 시기질투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성장과정이나 신분이 도마 위에 오른다. 집안이 천하다. 생활수준이 낮다거나, 기껏해야 사자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훼했다. 글씨도 창의적이지 못하다거나 예술적이지 못하고 속되다 주장 한다.

당연히 제왕이었던 선조의 총애를 받는다. 그것도 시기질투의 대상이다. 마음씨가 과격하고 어리석다거나 일처리를 잘못한다, 자리만 차지하고 일은 모두 아전에 맡겼다고 탄핵한다. 그때마다 석봉을 신뢰하던 선조가 나서 무마하였다. 1604년 공신녹권 필사를 맡았다. 일을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하고 고의로 글씨를 잘 못 썼다며 사헌부에서 탄핵한다. 얼마나 심했던지 결국은 파직시킨다. 1년여 만인 1605년 7월 사망한다. 파직이 사망 원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요즈음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본다. 시기질투로 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구나 치열한 삶의 과정을 간직하고 있다. 백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최선 아닐까? 돕지는 못하더라도 가로막지 않은 것이 순리 아닐까? 알몸으로 돌아가 부둥켜 안자.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양동길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학대 마음 상처는 나았을까… 연명치료 아이 결국 무연고 장례
  2. 김정겸 충남대 총장 "구성원 협의통해 글로컬 방향 제시… 통합은 긴 호흡으로 준비"
  3. 원금보장·고수익에 현혹…대전서도 투자리딩 사기 피해 잇달아 '주의'
  4. [대전미술 아카이브] 1970년대 대전미술의 활동 '제22회 국전 대전 전시'
  5. 대통령실지역기자단, 홍철호 정무수석 ‘무례 발언’ 강력 비판
  1. 20년 새 달라진 교사들의 교직 인식… 스트레스 1위 '학생 위반행위, 학부모 항의·소란'
  2. [대전다문화] 헌혈을 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3. [사설] '출연연 정년 65세 연장법안' 처리돼야
  4. [대전다문화] 여러 나라의 전화 받을 때의 표현 알아보기
  5. [대전다문화] 달라서 좋아? 달라도 좋아!

헤드라인 뉴스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시와 충남도가 행정구역 통합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장우 대전시장과 김태흠 충남지사, 조원휘 대전시의회 의장, 홍성현 충남도의회 의장은 21일 옛 충남도청사에서 대전시와 충남도를 통합한 '통합 지방자치단체'출범 추진을 위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했다. 대전시와 충남도는 수도권 일극 체제 극복, 지방소멸 방지를 위해 충청권 행정구역 통합 추진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대를 갖고 뜻을 모아왔으며, 이번 공동 선언을 통해 통합 논의를 본격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공동 선언문을 통해 두 시·도는 통합 지방자치단체를 설치하기 위한 특별..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