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석동산성 남문지. |
▲흑석동산성 조사 이렇게=흑석동산성은 1990년 5월 28일 시도기념물 제15호로 지정돼 보존·관리되고 있는 성벽으로 대전시의 종합정비계획에 따라 남동성벽과 추정 동문지, 남동성벽 구간의 정밀발굴조사, 추정 북문지와 성 내부 장대지 등 시굴조사를 진행했다. 현재 정밀발굴조사 구간 중 추정 동문지와 시굴조사 구간 중 추정 북문지는 완료했으며, 그 외 지역은 진행 중이다.
시굴·정밀발굴조사는 2022년 8월 22일부터 11월 29일까지 85일간 진행했으며, (재)동북아지석묘연구소가 참여했다. 시굴은 성 내부 국유지에 포함된 토지 4100㎡와 북문지로 추정되는 300㎡를, 정밀발굴조사는 동문지(추정)와 치가 존재하는 면적 520㎡와 상태가 양호한 남동성벽 구간 280㎡에 대해 진행했다.
흑석동산성의 올바른 모습을 찾고 현실적이고 체계적인 정비·복원계획을 수립하는데 반영한다는 데에 고고학적 발굴성과가 있으며,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의 분포 양상과 성격, 연대를 고증해 흑석동산성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한다. 정비계획의 기초자료 확보와 성곽시설 등의 효율적인 관리 방안을 검토하는 데 목적이 있다.
(왼쪽부터)북쪽에서 바라본 흑석동산성 전경과 외벽 축조양상. |
성벽 둘레는 479m, 성내 면적은 1만4840㎡이며, 평면형태는 삼각형에 가깝다. 성내 지형은 북쪽이 가장 높고 남쪽으로 갈수록 완만하게 경사지며, 북쪽 중앙부에서 서쪽과 동쪽으로 완만한 경사로 흘러내린다.
성벽은 거의 붕괴했으나 일부 성벽 구간에서 축조양상으로 북벽 내 석축구간과 토축구간을 확인할 수 있다. 토축구간은 성내에서 가장 높은 능선 정상부를 지나는 구간으로 성 바깥면은 자연 경사면을 그대로 이용한 것으로 보이며, 일부 구간은 성토법을 이용해 협축식(양쪽에 돌을 쌓아 만든 형식)으로 성벽을 축조했다. 석축구간은 북벽의 중앙부에서 서쪽 성벽과 이어지는 성벽 구간이다.
남벽은 가장 낮은 등고선 구간을 통과하는 구간으로 성벽은 모두 석축이며, 원래 성벽 높이는 5~6m가량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형을 유지한 성벽 구간은 없었다. 동벽은 능선의 경사면을 일직선으로 통과하는 구간으로 넝쿨이 심해 관찰하기 어려웠지만 석축 형태이며, 북벽과 연결되는 구간 부근에는 내외협축식으로 축조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동벽 중간부에서 길이 2m에 높이 1m, 층급 5단 정도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거의 다듬지 않은 막돌에 가까운 석재를 수직 형태로 쌓아 올렸다.
2022년 11월 9일 흑석동산성 발굴 시민 공개 후 현장설명회 모습. |
성의 남쪽에서 발견된 6m 높이의 백제 시대 석축(石築)은 그랭이기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견고함에 중점을 뒀음을 알 수 있다. 그랭이기법은 자연석 위에 기둥을 세울 때, 어느 한쪽을 깎거나 다듬어 돌의 모양에 맞추는 방식으로 돌과 돌 사이, 돌과 나무를 연결하는 축조방식 중 하나다.
주목할만한 건 정방형의 인장으로 찍어 새긴 명문기와가 무더기로 출토됐다는 점으로 백제 사비기의 표지(標指)적인 유물로 '인장와(印匠瓦)'라 불리는 이 기와에는 '存○丙辰瓦'가 새겨져 있으며, '丙辰(병진)'은 백제 596년으로 추정한다.
▲흑석동산성의 문헌사적 배경=흑성동산성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있으며, 성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보다는 나당연합군과 격전지였던 당시 상황이 기록돼 있다.
진현성(眞峴城) 혹은 정현성(貞峴城)으로 불리며, 위치는 공주 동쪽의 진령(鎭嶺)으로 보는 견해와 유성산성으로 보는 견해, 대덕 진잠면으로 보는 견해, 대전시 서구 봉곡동의 흑석동산성 일명 密岩山城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 권5 진잠조에는 "진잠(鎭岑)은 본래 진현이다. 진현성은 밀암고성(密岩古城)으로 속칭 미림고성(美林古城)이다"라는 대목이 있으며, 밀암산성은 지금의 흑석동산성을 말한다.
흑석동산성은 해발 197m의 고무래봉 정상부에 쌓은 내탁외축(內托外築)의 석축산성이며, 성벽 둘레는 약 540m이다. 이곳은 남쪽을 제외한 3면에 두마천(豆磨川)이 흐르고 경사면이 매우 가파르다. 도로 바로 옆은 대전에서 한삼천리를 거쳐 논산시 연산으로 이어진다.
부흥군이 성에 웅거한 것은 옹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신라의 군량 운송로인 웅진도(熊津道)를 다시 차단해 웅진부성의 당나라 군대를 고립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흑석동산성 출토 인장와. |
오랜 시간 산성을 연구해온 서정석 공주대 교수는 "축성 시기를 알아야 이걸 왜 쌓았는지 아는데, 기록이 없어 발굴조사를 하더라도 정확한 시기를 알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실제 발굴을 통해 백제 시대 성곽임이 밝혀진 건 흑석동산성이 유일하다"며 "월평동산성이나 계족산성 등 보는 연구자마다 시대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 여전히 이견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흑석동산성은 백제 의자왕이 항복 후 백제 유민들이 3년간 나당연합군에 저항하면서 주둔했던 성곽이다. 신라에서 사비도성(부여)으로 전해오는 나당연합군의 군량미를 차단함으로써 이들의 철수를 고민하는 등 곤란을 겪게 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성곽이다.
서 교수는 "당시 사비도성에 주둔했던 나당연합군이 군량미 보급이 끊기면서 철수를 고민했으나 662년 7월 2차 전투 때 함락됐다"며 "흑석동산성이 끝까지 함락되지 않았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며, 백제부흥운동기 주요 근거지로 예산 임존성과 전라도 주류성을 꼽는데, 이번 발굴을 계기로 흑석동산성의 역할과 의미가 새롭게 조명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이어 "흑석동산성 발굴은 그동안 '대전은 백제권'으로 추정으로만 일관했던 역사고증에 명백한 축성 시기를 보여준 데다, 공주와 부여를 지키는 요충지였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의미 있는 유적"이라며 "당시 백제성이 어떻게 쌓였는지를 연구할 중요한 근거이며, 시기의 척도를 가리는 '가늠자'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강조했다.
한세화 기자 kcjhsh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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