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혜 |
"이렇게 흘러가면 되는 건가?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가끔 이상한 게 보여도 무시하면서"
넷플릭스 시리즈 <글리치>의 지효가 부모님에게 남자친구와의 상견례를 제안하고 방으로 들어가 되뇌던 말이다. 지극히 평범해서 나무랄 데 없던 지효는 불과 며칠 뒤 외계인을 믿는 사이비 종교에 잠입하는 비일상의 변주로 겁도 없이 질주한다. 상식적인 삶을 살기 위해 외면해왔던 내면의 조각을 직접 검증해보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평범하고 성공적인 삶은 클래식하다. 그러나 도식을 따라가며 이명을 듣지 않는 이는 몇이나 될까. 따라가면 안 될 것 같지만 그럴수록 커져만 가는 내면의 소리들. 지효는 결국 이명을 악보 삼아 나아간다. 그 옆에는 "내 맘이다 왜!"를 외치게 할 만큼 유치하게 싸우면서도 "내일 나랑 같이 갈래?"라는 말로 기꺼이 함께하는 보라가 있다. 이미 자신만의 작법으로 척박한 길을 나서고 있던 보라 또한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지구를 넘어 우주로 가볼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는 각각의 평행우주에서 사는 수많은 에블린이 있다. 에블린들의 삶을 결정지은 것은 선택이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을 선택할지 말지, 꿈을 포기할지 말지. 그중 최악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에블린은 온 우주를 없애려던 조부 투바키와 세상을 동시에 구원한다.
선택으로 인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되어버린 갈라진 시간들을 '다른 우주에서의 나'라고 생각하면 어딘가 위안이 된다. 에블린처럼 세상을 구하진 못해도 세상을 헤쳐 나갈 가능성을 심어줬을 거라 믿고 싶게 한다. 아니, 어쩌면 구할지도 모른다. 조부 투바키가 소멸이 아닌 생을 택한 건 에블린의 이해와 사랑 때문이었으므로.
함께 사라져버릴 사람을 찾기 위해 우주를 넘나들던 조부 투바키는 에블린과의 포옹으로 가장 실패한 우주에서 계속 존재하기로 한다. 질주의 끝에서 무너진 지효는 "다시 찾으면 되지. 안 그러냐?"라는 보라의 말에 끄덕이고 마침내 두 사람 앞에 찾아 헤맸던 것이 펼쳐진다.
잠깐의 일탈로 끝날 것 같았던 보라와 지효의 이야기는 일상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계속된다. 어쩌면 나의 우주를 결정하는 것은 선택의 방향이 아닌 그 방향으로 함께 걷는 사람이 아닐까. 그곳이 어디든 어느 순간 보라와 함께 걷던 지효처럼 우리 또한 나의 우주, 혹은 너의 우주에서 이렇게 말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너 복층 좋아해? 나랑 같이 살래?" / 안다혜 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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