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민 전 대전여성단체연합대표 |
제주 4·3은 1947년 삼일절 기념대회를 위해 모인 사람 중 한 어린이가 경찰이 타고 있던 말발굽에 차이고, 이에 항의하는 민간인들에게 경찰이 발포해 사망자가 발행하면서 이후 걷잡을 수 없는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확대된 슬픈 역사다. 식민지에서 벗어났지만 남북분단으로 얻어진 반쪽짜리 해방에 대한 불만과 통일정부를 바라는 민족의 염원, 이념과 사상의 탈을 쓴 광기와 분노가 응축되어 나타난 폭력의 도가니와 같았던 제주 4·3의 피해와 가해의 역사는 오랫동안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금기어였다. 뒤늦게 김대중 정부에서 4·3의 참상이 드러났고, 2001년 발표된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사망자 중10,955명(78.1%)이 토벌대에 의해, 1,764명(12.6%)은 무장대에 의해 살해됐다. 수많은 '순이 삼촌'으로 남은 유족들의 고통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교육부가 제주 4·3을 지우고 고교 교과서 성취기준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정 탐색'을 굳이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대한민국 정부수립 과정 탐색'이라고 바꿔 기술한 것을 보면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합해놓은 의미 이상의 함의가 느껴진다. 윤석열 정부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 배제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이 기시감은 뭘까.
원래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냉전시기 서구 입헌민주주의를 공산국가의 인민민주주의에 대비시켜 부르는 말이었고 사회민주주의와 다른 자유주의 시장경제와 시장논리에 따른 자본주의에 방점이 있다는 점에서 윤석열 정부의 '자유민주주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2009년 개정 교육과정 중·고교 교과서 집필기준에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했던 이명박 정부와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 같다.
실상 교과서를 사용할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해, 4·3의 역사에 대해 배우고 분단과 이념, 국가권력과 폭력에 대해서 논쟁적으로 학습할 기회를 바라지 않을까. 4·3을 생각하면 식민 지배와 해방, 미군정, 분단, 이념, 통일, 경찰, 민중, 저항, 서북청년단, 토벌, 학살, 순이삼촌 등이 연관검색어처럼 줄줄이 떠오른다.
4·3은 단순하지 않다. 해방공간에서 발생한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어두운 폭력의 역사지만 그럴수록 더 들여다보고 성찰해야 한다. 독일이 오래전부터 학교에서 정치교육이란 이름으로 나치 범죄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반성이 공유되고 지속되는 것처럼 우리도 권력을 가진 정부, 권력을 위임한 국민 모두 4·3의 비극을 기억하며 4·3의 역사에서 배우고, 무엇보다도 사람을 존엄한 존재로, 맹목적인 따름이나 강요, 혐오와 폭력에 반대할 수 있는 능력과 실천에 초점을 맞춘 민주시민교육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교육기본법> 제2조에 명시된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함양하는 첫걸음은 역사적인 사건을 외우거나 단순히 정부 형태와 정권의 눈높이 따라 달라지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적 가치와 태도를 일상생활에서, 자기 삶에서 내면화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2005년 독일 연방과 주협의회가 주최한 '민주주의 배우기와 살아가기'라는 프로그램에 채택된 민주주의 교육을 위한 <마그데부르크 선언>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전체 열 개로 정리된 선언 중에 "민주주의를 지키고 살아있게 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헌법이나 선언이나 정부의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의 형식이자 삶의 양식으로 정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두 번째 항은 현 정부가 꼭 새겨들었으면 한다. 역사를 배울 게 아니라 역사에서 배우게 하자. 우리 미래에게! /최영민 전 대전여성단체연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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