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아츠시 씨가 일본 고난시 자택에서 기자와 만나 보문산 별장 대전시문화재 등록을 다룬 중도일보를 보며 대전에 대한 기억을 설명했다. |
쓰지 아츠시 씨는 1938년 대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까지 대전에서 학교를 다닌 재조선 일본인 귀환자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시대를 의미할 때를 조선이라고 칭하고 한일병합 이전과 광복 이후는 한국이라고 표현했을 때 일제시대 조선에서 거주한 그는 대전과 인연이 깊다. 그의 할아버지 쓰지 긴노스케(辻勤之祖, 1881~1931)가 한일 강제병합 이전인 1904년 한국으로 이주해 대전에서 면직물 판매업을 시작해 1907년 세운 쓰지장유(辻醬油釀造場)라는 간장공장이 역시 대전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 쓰지 만타로(辻萬太郞, 1909~1983) 때에 주식회사 형태의 후지츄양조(富士忠醬油)로 전환되어 대전에서 보기 드물게 큰 성공을 이뤘다. 1938년 당시 신문 보도를 기준으로 대전부 전체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6명 중에 김갑순과 조선흥업회사 등과 함께 쓰지 만타로 씨가 포함될 정도로 토지주이기도 했다.
쓰지 씨가 그의 생애에 기억 남는 때를 모은 그림. 쓰지 씨가 직접 그렸다고 한다. |
쓰지 씨는 "대전역 옆에 있던 후지츄 간장공장에 100여 명이 일했는데 관리자를 비롯해 대부분 한국인이었고 사이좋게 지냈다"라며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태평양전쟁이 종결되고도 대전에 끝까지 남을 수 있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왕의 항복선언과 포츠담선언을 수용하겠다고 밝힌 이후 대전에서 생활을 이렇게 기억한다. "일본인 중에서도 한국인과 관계가 나빴던 이들은 재빨리 도망치듯 일본으로 귀국했고 그들은 한국에 재산도 가져갔으나, 아버지께서는 10월 말까지 그대로 대전에 남아 계셨고 어떻게든 계속 정착하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라며 "그러나 일본에서 근로했던 이들이 돌아와 (일본인을 향해)시위 같은 것을 하고 상황이 바뀌면서 저는 운영을 멈춘 공장 안에서만 지냈고 결국 대전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저희가 일본으로 귀환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날 대화는 대전시가 문화재로 등록을 예고한 옛 보문사 요사채로 화제가 옮겨갔다. 대전시는 10월 말 보문산 옛 케이블카 인근에 있는 68㎡의 아담한 단층 주택을 대전시 문화재로 등록한다고 밝혔다. 해당 주택은 쓰지 만타로 씨가 1931년 가족의 별장을 목적으로 지은 집으로 사찰의 승방으로 사용되면서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보전됐다.
쓰지 만타로 씨가 만든 보문산 별장. 대전시문화재 등록을 앞뒀다. |
보문산은 그에게 또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아버지 쓰지 만타로 씨의 생전 유언에 따라 1983년 숨을 거둔 아버지의 유골 절반을 보문산에 안장했다. 쓰지 만타로 씨는 1945년 11월 일본으로 귀환한 뒤 한국이나 대전을 한 차례도 찾아오지 않았으나 유해만큼은 보문산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쓰지 씨는 "저는 1975년께 출장 차 전남 여수를 갔다가 저희 집안과 오랫동안 교류한 이영생(1915~1992) 씨의 도움으로 대전을 방문해 제가 자란 집과 보문산 별장을 둘러보았고, 1993년에는 여러 가족을 모시고 대전엑스포를 관람하는 등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라며 "아버지께서는 저희와 함께 대전에 다녀오자는 제안에 응하지 않으셨지만, 제가 촬영한 사진을 자세히 보시고 퍼즐을 맞추듯 오랜 시간 작업하셨다"고 기억했다. 쓰지 만타로 씨는 대전을 다시 찾지 않았으나 자신의 기억을 여러 자료로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 7년간의 집필 기간 끝에 대전에서 삶을 다룬 '포플라와 바가지'라는 책을 출간했다. 기억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문서자료와 관련자 인터뷰를 통해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노력해 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대전에서 태어난 재조일본인 쓰지 만타로와 그의 부인 우타. 후지츄장유로 대표되는 쓰지 집안은 대전과 인연이 깊다. |
그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지금 한일관계가 좋지 않아 가슴 아프지만, 형제라도 사이 나쁠 때가 있다"며 "한일 젊은 세대부터라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기를 바라고 그것이 숙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본 아이치현=임병안 기자 victorylba@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통해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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