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은 돼 보이는 꼬마와 부인이 안쓰러워 자리에서 일어나며 앉으라고 했다. 부인은 두 정거장만 가면 내린다며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 서 있는 꼬마한테 우리 아가라도 이리 와 앉으라고 했더니 꼬마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재차 꼬마를 불러 이리 와서 같이 앉자 했더니 그 꼬마 하는 말이, "엄마 난 싫어."하니, 엄마의 하는 말이 " 태진아, 그러지 말고 할아버지 무릎에 가서 앉아!"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 할아버지 '란 불청객의 단어가 뇌리를 자극했다.
내가 벌써 '할아버지'로 보이다니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이었다.
순간 스쳐오는 세월의 무상감에 가슴이 무지근했다.
방금 전 내가 내준 자리를, 부인이 사양한 것도 나를 할아버지로 생각해서 그랬다는 판단이 들었다.
별안간 '할아버지'란 호칭 한 마디에 숙연한 마음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이든 사람이면 거부반응 없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하는 호칭인데도 나는 그게 왜 그리 쉽질 않은지 모르겠다.
찻간에서 누가 자리 양보를 해 주어도 그 자리를 앉으면 '할아버지'로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 같아 그게 그렇게 싫었다. 빈자리가 있어 내 스스로 앉는 것은 모르겠지만 양보 받은 자리는 앉기가 싫었다.
어디 음식점을 가서도 종업원이나 주인이, '할아버지 어서 오셔요'하는 그런 업소는 가기가 싫었다.
요즈음은, 이런 사람의 심리를 잘 알아서인지 각종 업소의 종업원과 주인들도 연세 드신 노인들께 '할아버지', '할머니'라 호칭하지 않고, '아버님'이나 '어머님' 아니면 '고객님'으로 부르는 것을 많이 보았다. 센스 있는 재치라 생각한다.
내가 벌써 '할아버지'나 '어르신'으로 불리는 나이가 됐다니 !
< 야, 이 꼬마야 ! >,< 게 있는 학생 ! >,< 저 믿음직한 청년 ! >,< 아저씨 ! > 하던 호칭은 다 어디 가고 신조어처럼 들리는 '할아버지'란 단어 하나에 기분이 좌우되는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 !
가는 세월 속에' 어허! '소리 몇 번 하는 사이에 머리는 서리 밭이 다 돼 버렸네!
귀소본능으로 나이 들면 사람들은 고향을 자주 찾는데, 나는 고향에 자주 가질 못했다. 명절 때나 어른들 생신 때 아니면, 동리에 큰 일이 있을 때나 고향을 방문한 것이 고작이었으니 말이다.
고향에는 어머니 아버지 연배 되시는 어른이 유일하게 해로(偕老)하고 계셨다.
나는 그 어른들을 뵐 때마다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손길을 느끼는 것 같아 고향 갈 때면 으레껏 찾아뵙곤 하였다.
그럴 때는 부모님 뵙는 생각으로 쇠고기 한 근에, 어른들이 좋아하시는 박하사탕 한 봉지를 사들고 찾아뵙곤 하였다. 빈손으로 가기가 좀 민망하여 한 소행이었지만 어른들은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갈 적마다 그렇게 반가워하시고 동네 사람들한테까지 소문을 내곤 하셨다. 찾아뵙는 때가 건강하실 적도 있었지만 병환으로 아파 계신 때도 있었다.
부모님이 그리워서 찾아뵌 어른들이셨기에 어른들의 체취를 느껴 보고 싶었다. 손을 잡았다. 어머니 아버지 체온을 느끼고 싶어 만져본 손이었지만 군데군데 검버섯이 나 있는 쭈글쭈글한 손이었다. 평생 농사 이력으로 생긴 군살이 아직도 딱딱한 못이 되어 농부의 한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앙 마딘 어른들의 손길을 곱살한 내 손으로 체감하기엔 죄송했지만 그래도 그 손길엔 어머니와 아버지의 체온을 느끼는 기분이어서 좋았다. 잡은 손을 한 동안 놓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두 분을 뵙고 만지는 스킨십을 통해 어머니 아버지를 느끼는 대리만족에 취해보기 위해서였다.
아니, 그것은 남다른 도덕심이나 윤리의식에서가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 체취를 느껴보기 위함이었다.
인사를 드리고 나올 때는 뭐 하나라도 주고 싶어서 바리바리 싼 비닐봉투 꾸러미가 한 보따리나 되었다. 거기엔 직접 농사지은 거라며 검정콩 한 되에 마늘 반접도 참깨 반 됫박도, 들기름 병도 있었다. 이것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정성과 사랑을 담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또 다른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따뜻한 가슴으로 주시는 사람냄새를 그득 담은 보물임에 틀림없었다.
매정한 세월이라더니, 부모님 체온과 따뜻한 가슴으로 대리만족을 시켜 주셨던 그 어른들마저 먼 길 떠나신 지 벌써 대여섯 해나 되었다.
난 이제 어디서 그런 따뜻한 가슴과 손길을 느끼며 살아야 하나!
고향을 지키며 사셨던 분들이 한 분 두 분 다 떠나고, 번호표 받은 숙부님 내외분과 두세 살 연상 형뻘 되는 분들이 1, 2번으로 순번 대기를 하고 있다. 앞 번호 바로 비우면 다음엔 내가 갈 차례, 내 순번이 세 번째임에 틀림없다.
우탁의 백발가를 실감하는 나이,
'내 순번이 세 번째지만 '그냥 날개를 접을 수는 없다.
'내 순번이 세 번째지만 '
가는 날까지 백발이 사람냄새로 부피팽창하도록 불쏘시개를 쉬지 않고 지펴야겠다.
우탁의 백발가를 읊조리며 늘어나는 백발이 사람냄새가 되도록 살아야겠다.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 백발가 / 우탁-
'내 순번이 세 번째지만 '
백발한테 사람의 향기 뺏기지 않는 내 몫을 다해야겠다.
남상선/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전 조정위원
남상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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