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톡] 내 순번이 세 번째지만

  • 오피니언
  • 여론광장

[수필 톡] 내 순번이 세 번째지만

남상선/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전 조정위원

  • 승인 2022-11-11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지난 10월 중순 만원시내버스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 겨우 자리를 잡았다. 얼마를 가다 보니 중년 부인이 등에는 아기가 업혀 있고 한 손에는 꼬마 손을 잡은 채 차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다섯 살은 돼 보이는 꼬마와 부인이 안쓰러워 자리에서 일어나며 앉으라고 했다. 부인은 두 정거장만 가면 내린다며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 서 있는 꼬마한테 우리 아가라도 이리 와 앉으라고 했더니 꼬마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재차 꼬마를 불러 이리 와서 같이 앉자 했더니 그 꼬마 하는 말이, "엄마 난 싫어."하니, 엄마의 하는 말이 " 태진아, 그러지 말고 할아버지 무릎에 가서 앉아!"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 할아버지 '란 불청객의 단어가 뇌리를 자극했다.

내가 벌써 '할아버지'로 보이다니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이었다.



순간 스쳐오는 세월의 무상감에 가슴이 무지근했다.

방금 전 내가 내준 자리를, 부인이 사양한 것도 나를 할아버지로 생각해서 그랬다는 판단이 들었다.

별안간 '할아버지'란 호칭 한 마디에 숙연한 마음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이든 사람이면 거부반응 없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하는 호칭인데도 나는 그게 왜 그리 쉽질 않은지 모르겠다.

찻간에서 누가 자리 양보를 해 주어도 그 자리를 앉으면 '할아버지'로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 같아 그게 그렇게 싫었다. 빈자리가 있어 내 스스로 앉는 것은 모르겠지만 양보 받은 자리는 앉기가 싫었다.

어디 음식점을 가서도 종업원이나 주인이, '할아버지 어서 오셔요'하는 그런 업소는 가기가 싫었다.

요즈음은, 이런 사람의 심리를 잘 알아서인지 각종 업소의 종업원과 주인들도 연세 드신 노인들께 '할아버지', '할머니'라 호칭하지 않고, '아버님'이나 '어머님' 아니면 '고객님'으로 부르는 것을 많이 보았다. 센스 있는 재치라 생각한다.

내가 벌써 '할아버지'나 '어르신'으로 불리는 나이가 됐다니 !

< 야, 이 꼬마야 ! >,< 게 있는 학생 ! >,< 저 믿음직한 청년 ! >,< 아저씨 ! > 하던 호칭은 다 어디 가고 신조어처럼 들리는 '할아버지'란 단어 하나에 기분이 좌우되는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 !

가는 세월 속에' 어허! '소리 몇 번 하는 사이에 머리는 서리 밭이 다 돼 버렸네!

귀소본능으로 나이 들면 사람들은 고향을 자주 찾는데, 나는 고향에 자주 가질 못했다. 명절 때나 어른들 생신 때 아니면, 동리에 큰 일이 있을 때나 고향을 방문한 것이 고작이었으니 말이다.

고향에는 어머니 아버지 연배 되시는 어른이 유일하게 해로(偕老)하고 계셨다.

나는 그 어른들을 뵐 때마다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손길을 느끼는 것 같아 고향 갈 때면 으레껏 찾아뵙곤 하였다.

그럴 때는 부모님 뵙는 생각으로 쇠고기 한 근에, 어른들이 좋아하시는 박하사탕 한 봉지를 사들고 찾아뵙곤 하였다. 빈손으로 가기가 좀 민망하여 한 소행이었지만 어른들은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갈 적마다 그렇게 반가워하시고 동네 사람들한테까지 소문을 내곤 하셨다. 찾아뵙는 때가 건강하실 적도 있었지만 병환으로 아파 계신 때도 있었다.

부모님이 그리워서 찾아뵌 어른들이셨기에 어른들의 체취를 느껴 보고 싶었다. 손을 잡았다. 어머니 아버지 체온을 느끼고 싶어 만져본 손이었지만 군데군데 검버섯이 나 있는 쭈글쭈글한 손이었다. 평생 농사 이력으로 생긴 군살이 아직도 딱딱한 못이 되어 농부의 한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앙 마딘 어른들의 손길을 곱살한 내 손으로 체감하기엔 죄송했지만 그래도 그 손길엔 어머니와 아버지의 체온을 느끼는 기분이어서 좋았다. 잡은 손을 한 동안 놓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두 분을 뵙고 만지는 스킨십을 통해 어머니 아버지를 느끼는 대리만족에 취해보기 위해서였다.

아니, 그것은 남다른 도덕심이나 윤리의식에서가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 체취를 느껴보기 위함이었다.

인사를 드리고 나올 때는 뭐 하나라도 주고 싶어서 바리바리 싼 비닐봉투 꾸러미가 한 보따리나 되었다. 거기엔 직접 농사지은 거라며 검정콩 한 되에 마늘 반접도 참깨 반 됫박도, 들기름 병도 있었다. 이것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정성과 사랑을 담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또 다른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따뜻한 가슴으로 주시는 사람냄새를 그득 담은 보물임에 틀림없었다.

매정한 세월이라더니, 부모님 체온과 따뜻한 가슴으로 대리만족을 시켜 주셨던 그 어른들마저 먼 길 떠나신 지 벌써 대여섯 해나 되었다.

난 이제 어디서 그런 따뜻한 가슴과 손길을 느끼며 살아야 하나!

고향을 지키며 사셨던 분들이 한 분 두 분 다 떠나고, 번호표 받은 숙부님 내외분과 두세 살 연상 형뻘 되는 분들이 1, 2번으로 순번 대기를 하고 있다. 앞 번호 바로 비우면 다음엔 내가 갈 차례, 내 순번이 세 번째임에 틀림없다.

우탁의 백발가를 실감하는 나이,

'내 순번이 세 번째지만 '그냥 날개를 접을 수는 없다.

'내 순번이 세 번째지만 '

가는 날까지 백발이 사람냄새로 부피팽창하도록 불쏘시개를 쉬지 않고 지펴야겠다.

우탁의 백발가를 읊조리며 늘어나는 백발이 사람냄새가 되도록 살아야겠다.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 백발가 / 우탁-

'내 순번이 세 번째지만 '

백발한테 사람의 향기 뺏기지 않는 내 몫을 다해야겠다.

남상선/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전 조정위원

남상선
남상선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학대 마음 상처는 나았을까… 연명치료 아이 결국 무연고 장례
  2. 김정겸 충남대 총장 "구성원 협의통해 글로컬 방향 제시… 통합은 긴 호흡으로 준비"
  3. 원금보장·고수익에 현혹…대전서도 투자리딩 사기 피해 잇달아 '주의'
  4. [대전미술 아카이브] 1970년대 대전미술의 활동 '제22회 국전 대전 전시'
  5. 대통령실지역기자단, 홍철호 정무수석 ‘무례 발언’ 강력 비판
  1. 20년 새 달라진 교사들의 교직 인식… 스트레스 1위 '학생 위반행위, 학부모 항의·소란'
  2. [대전다문화] 헌혈을 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3. [사설] '출연연 정년 65세 연장법안' 처리돼야
  4. [대전다문화] 여러 나라의 전화 받을 때의 표현 알아보기
  5. [대전다문화] 달라서 좋아? 달라도 좋아!

헤드라인 뉴스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시와 충남도가 행정구역 통합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장우 대전시장과 김태흠 충남지사, 조원휘 대전시의회 의장, 홍성현 충남도의회 의장은 21일 옛 충남도청사에서 대전시와 충남도를 통합한 '통합 지방자치단체'출범 추진을 위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했다. 대전시와 충남도는 수도권 일극 체제 극복, 지방소멸 방지를 위해 충청권 행정구역 통합 추진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대를 갖고 뜻을 모아왔으며, 이번 공동 선언을 통해 통합 논의를 본격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공동 선언문을 통해 두 시·도는 통합 지방자치단체를 설치하기 위한 특별..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