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우 대전향토문화연구회 회장 |
대전을 이야기할 때 근대도시나 과학의 도시, 기호 유학의 텃밭 등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전이 선사시대부터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통신 인근 괴정동(현 내동) 유적은 1960년대 말 한 농부가 경작 중 쟁기에 돌이 걸려 돌을 들어내던 중 유물이 발견되었다. 당시 해방 후 최대의 일괄 청동기 유물로 유적은 농부에 의해 파괴되어 유물의 출토 상황은 알 수 없으나 비교적 농부가 자세히 기억하여 나중에 재조사 과정에서 유구를 조사할 수 있었다. 당시 출토유물로는 한국식 동검 1점, 거울 2점, 검파형동검 3점, 방패형 동기 1점, 원개형 청동기 1점, 방울 2점, 마제 석촉 3점, 천하석제 장식옥 2점, 흑도 장경호 1점, 점토대 토기 1점 등이 출토되었다. 괴정동 석관묘 유적은 한국식 동검이 나오는 유적으로는 가장 빠른 시기이며 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우리나라 청동기 유물 중 최고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지역의 박물관에서는 직접 볼 기회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는 대전시가 광역시로 승격되었음에도 대전은 스스로의 정체성도 없는 문화적 불모지인 도시를 자처하는 것이었다. 늦게나마 특별전을 통하여 시민들이 이러한 유물을 대하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방패모양 청동기는 전 대전출토 농경문청동기의 형태와 유사해 관심을 끌고 있다. 농경문청동기는 아랫부분이 깨져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다. 전체적인 형태가 대전 괴정동유적과 아산남성리 유적에서 출토된 방패 모양 청동기와 매우 유사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농경문청동기의 문양은 따비와 괭이로 땅을 일구어 씨앗을 뿌리고 마을의 평화를 지키고 풍요를 바라는 솟대를 높이 세운 모습이다. 1969년 대전의 고물상과 서울 상인을 통해 2만8000원에 구입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파손되고 녹이 심해 크게 기대를 모으지 못했다. 녹을 제거하고 보존처리를 완료하자 누구도 상상 못 할 일이 벌어졌다. 선사시대 대표적인 회화작품이자 농경이 발달한 사회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청동의기가 등장한 것이다. 미국, 독일 등 국내외 여러 전시에서 한국적 청동기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명품으로 소개되고 있다. 농경문청동기는 국내외 여러 전시에서 한국적 청동기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명품이다. 대전은 청동기 문화의 메카인 셈이다.
2007년 9월 대전시청 회의실에서 대전역사문화단체로 구성된 '괴정동 청동기유적 발굴 40주년 기념추진위'는 기념 학술세미나를 갖고 그 현장을 찾아 그 장소를 알리는 표지석을 건립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 소식이 지역의 신문에 보도되자 한 통의 제보 전화가 왔었다. 괴정동청동기 일괄 유물이 비슷한 시기에 괴정동 석관묘 인근에서 건축공사 중 제보자가 발견한 것과 너무 유사하다는 제보였다. 그리하여 전문가와 관계자들이 제보자와 동행하여 현장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 괴정동 석관묘 유적과 아주 가까운 장소가 특정되었다. 그곳이 개인의 사유지인 관계로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지만, 괴정동 일대가 대전지역 청동기 문화의 한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 대전출토 농경문청동기의 출처를 밝힐 수 있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아비를 아비라고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얘기처럼 대전 괴정동 출토 청동기 유물을 우리의 것이라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웃 청주는 '직지의 도시'라 하며 청주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 직지를 도시 브랜드로 삼는다. 실상 청주에는 없는 직지를 갖고 이러한 자신감이 넘치는 이웃을 보면 대단하다고 느껴지기도 일면은 부럽기까지도 하다. 하나 우리는 존재하는 청동기 유물을 갖고 시민들이 대전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대전 괴정동 출토 청동기유물은 고향을 떠난 지 55년 만의 귀향이다. 대전시민 모두 다 환영할 일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 우리는 대전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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