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사(李匡師, 1705 ~ 1777)는 조선의 문예부흥기인 영조연간을 살아간 시서화가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소론이 실각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다. 게다가 1755년 소론 일파의 역모에 휘말려 함경도 부령에 유배된다. 부령에서 7년간 유배되었다가 1762년 신지도로 이배되어 1777년 8월 생을 마감한다. 15년간 신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것이다.
이광사는 시서화 모두에 능했다. 특히 서예에 조예가 깊다. 옥동 이서(玉洞 李?, 1662∼1723)가 전통적인 진체(晉體)를 바탕으로 창안한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동국진체(東國眞體)로 칭해지는 옥동체(玉洞體)는 윤두서에게 전해지고, 윤순(尹淳, 1680∼1741)을 거쳐 이광사에게 사사되었기 때문이다. 5체에 모두 능하였으며 그의 독특한 서체를 원교체(圓嶠體)라 부른다.
전화위복이었을까? 남도의 웬만한 절 현판은 이광사가 썼다. 강진 백련사, 고창 선운사, 구례 천은사, 해남 대흥사가 대표적이다. 물론 당대에도 천하명필로 필명을 떨쳤기 때문에, 사찰뿐 아니라 글 받아가려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완도의 서예가나 학자, 군민에게는 동국진체 완성지라는 자부심이 보인다. 때문에 동국진체 완성지 성역화사업 추진위가 활동해왔다. 개성 넘치는 서체를 선양하는 것이 잘못되거나 나쁠 이유는 없다. 동국진체 운운 보다는 '원교 이광사 문화거리'가 더 좋지 않을까? 지역과 역사 사랑에 아낌없는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
동국진체가 우리 고유서체를 발전시킨 것, 또는 창안한 것이라 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김병헌의 다시 짚어보는 우리역사>에서는 동국진체는 없다고 주장한다. 동국진체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옥동 이서의 글씨는 그냥 옥동체라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다. 각자의 개성 있는 서체가 있을 뿐 어떤 서체를 창안하였다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추사체를 창안하였다고 서술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말이다. 추사의 독특한 글씨체에 후학이 그의 호를 붙여 추사체라 부르는 것이지, 추사가 추사체로 명명하고 창안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광사의 후배인 김정희는 '세상이 다 원교의 필명(筆名)에 온통 미혹(震耀?진요)돼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니, 참람하고 망령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큰 소리로 외쳐 심한 말을 꺼리지 않는구나. 원교는 천품이 남보다 뛰어났으나 재주만 있고 배움은 없었다'(완당집 6권)라고 주장하며 "졸렬한 필법"이라 악평한다.
서예가는 글씨에 예술적 개성, 독창적 풍격(風格)으로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담으려한다. 얼마나 많은 고뇌와 사연이 담기랴? 따라서 차이가 있을 뿐 품등이 있다 생각하지 않는다. 함부로 누구의 작품세계를 논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뜻에서 몇 가지 상반되는 얘기를 옮겨보았다.
이광사는 서예이론서 <서결(書訣)>을 저술하였다. 중국 명나라의 풍방(豊坊)이 지은 <서결>이 있어 <원교서결(圓嶠書訣)>로 부른다. 여기에도 공부의 어려움을 적나라하게 남겼다. 간추려 보면 이렇다. 목하 정지원선생의 번역문이다.
처음에 내가 서예를 배울 때는 누가 말로 설명해주거나 시범을 보여주지도 못하였기에 올바른 서법을 깨우치는 데 아주 어려웠습니다. 수십 년 동안 깊이 연구하고 붓 1천여 자루가 닳도록 연습한 뒤에야 서법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익히기 어려울수록 더욱 좋아하고 빠져들었습니다. 낮에는 밥 먹는 것도 잊고 밤에는 잠자는 것도 잊었고 여름에는 자주 밤새웠습니다. 누우면 손가락으로 배 위에 획을 써보고 일어나면 붓을 손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옛날 사람의 지극한 경지에 이를 때까지 연습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중년에 학생들에게 서예를 가르치면서 반드시 상세하게 서법을 설명하고 또 내가 수십 년 동안에 깨달은 것들도 말해주었더니 이해력이 빠른 학생은 며칠 만에, 둔한 학생도 한 달 안에 이해하였으나 아무도 끝내 내가 가르쳐준 서법의 기술을 익히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이 깊이 잘 이해할수록 흥미가 얕아져서 빠져들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붓글씨를 써서 가르쳤고 말로는 설명하지 않고 학생 스스로 익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서결』에서는 올바른 붓 사용법과 획 쓰는 방법 두 가지를 상세하게 설명한 까닭은 아침 이슬 같은 짧은 인생을 생각하니 아무래도 전수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글을 지어 둘째 아들 이영익(李令翊, 1740-?)에게 전해주면서 "너는 마땅히 올바른 서예를 정숙(精熟)하도록 배우고 익혀서 내가 어렵게 알아낸 것을 이해하도록 하여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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