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선 교수 |
언론인과 언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에게도 <독립신문>은 익히 알려진 언론매체다. 1896년 서재필 등이 발행한 <독립신문>과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이 있다. 대한제국 시기의 독립신문은 창간호에서 정치적으로 편벽되지 않을 것이며 공평하게 보도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정부와 백성 간의 소통을 도모하겠다고 천명했다. 또 상하귀천과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 띄어쓰기를 했다. 독립신문은 논설에서 '바른대로'만 취재하고 보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면 보도할 것이요, 탐관오리의 행적을 낱낱이 파헤칠 것이며, 사사로운 여염집 백성이라도 무법한 자는 찾아내 보도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서울에 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인민을 위해 신문을 발행하겠노라고 말했다.
독립신문은 논설보다 '광고'를 상단에 편집했다. 독자들의 불만 접수와 투고를 환영하며 부산과 원산 인천 등지에 분국을 설치했다는 것을 알렸다. 거리에서 신문을 판매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열부 중에 두 부, 백부 중에 이십 부를 덤으로 끼워준다는 판매정보도 실었다. 더 중요한 정보를 제시했다. 신문구독료였다. 한 장에 동전 한 푼을 받았다. 구독료는 월 십이 전이며 연간 일원 삼십 전이었다. 정기구독을 하고 싶은 사람은 '정동 신문사'로 와서 돈을 미리 내고 성명과 주소를 적어 놓고 가라고 안내했다. 독립신문을 구독하고 싶은 백성들은 서울 정동의 어디로 찾아가야 했을까, 신문사는 구체적으로 그 거리의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그 마땅한 질문을 당연한 것으로 질문하지 못했다.
정년퇴임을 바로 앞에 둔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묻혀질 뻔한 이 질문을 했다. 2000년 가을 마지막 학기 어느 날, 오인환 교수는 제자들과 차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우연한 호기심인 것처럼, 독립신문사가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던졌다. 스승은 스스로 놀랐다. 통신사 기자로 10년, 언론학 교수로 사반세기, 언론학 분야에서 반세기를 살아오면서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스승은 한국 언론이 '신문의 날'로 정해 기념해 온 독립신문의 사옥 터가 어디였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스승은 정년퇴임 후 22년간, 한국 언론의 자취를 찾아 서울의 거리를 구석구석 누볐다. 2008년 <100년 전 한성을 누비다>, 2018년 <일제 강점기 경성을 누비다> 그리고 올해 <해방공간 서울을 누비다>를 펴냈다. 책에는 신문사들의 창간호와 신문사 사옥의 위치 정보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스승은 이 책들을 우리나라 앞날의 갈림길에서 역투한 대선배 언론인들에게 바친다고 쓰셨다. 스승은 1935년생, 우리 나이로 아흔이다. 학자로서 노년의 삶이 얼마나 치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신다. 1883년 한성에서 발행된 <한성순보>를 기준으로 하자면, 한국 신문 140년사에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을 스승이 일궈냈다. 오로지 당신의 발품을 팔아서 이룬 성과다.
사람의 생각과 삶에는 무늬가 있다. 그 사람의 생애 전부가 담긴 무늬다. 스승은 '우연한 기회에 문득' 던진 질문이라고 자세를 낮추셨으나, 우리는 그의 생애가 전부 담긴 매우 당연한 스승의 '질문'이라고 해석한다. 정년퇴임 전 스승의 삶이 그러하셨다. 퇴임 후에 스승께서는 역시 행동으로 여전히 같은 답을 보여주셨다. 정년 후 사반세기의 생애를 바쳐 한성과 경성과 서울을 누비고 '언론지리지'(言論地理誌) 세 권을 펴낸 스승의 노년은 아름답다. 스승의 그윽한 삶의 무늬에 머리 숙인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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