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늦었잖아. 더구나 방학 중인데 이게 맞아?' 개학하면 휴대전화 사용 예절부터 다시 교육하리라 마음먹고 침대에 도로 누워 툴툴거리고 있자니 문득 학창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다른 집에 연락하기란 제법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더구나 밤늦은 시각에 특별한 사유 없이 전화하는 것은 큰 결례로 여겨졌다. 가정에서는 물론 학교에서도 이런 원칙을 강조하며 가르치고 배워왔으니 당연한 일상이었다.
그중에서도 선생님께 하는 연락은 학생들에게 금기에 가까웠다. 선생님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 말씀하셨으나, 질문은커녕 '내일 갑작스러운 일로 결석해야 할 것 같아요.' 같은 꼭 해야 할 말조차 부담스러워 부모님께 부탁한 적도 많다. 그렇게 겨우 연락하고 나서도 다음날 선생님께서 혹시 날 나무라시는 건 아닌지 작은 가슴이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그랬던 내가 어른이 되고 선생님이 되는 동안 시대는 빠르게 변해갔다. 어린 시절 마주한 엄격한 선생님에 대한 반발감이었을까 난 비교적 허용적이고 친절한 선생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가오는 학생들을 살갑게 맞아주고, 친구 사이 문제가 있으면 벌을 주기보다 그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안배하고자 노력해왔다. 학생들도 편안함을 느껴서였는지 쉬는 시간이면 스스럼없이 다가와 재잘거리며 장난도 치고, 까칠한 학생들도 선생님을 어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누군가는 친절하고 좋은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고민도 적지 않다. 오늘 밤과 같은 늦은 연락도 쿨하게 받아주는 선생님. 학교 밖 사건에도 내 일처럼 함께 걱정해주고 보살펴주는 선생님이 좋다지만 정작 개인인 '나'의 사생활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퇴근 이후 교문 밖을 나서며 선생님 딱지는 명찰과 함께 학교에 두고 왔는데, 여전히 나는 직장인으로서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학교 선생님이란 동네 연예인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학군을 지나가다 보면 처음 보는 학생, 학부모님께 인사를 받기도 하고, 술이라도 한잔하려면 죄라도 지은 것처럼 학군은 되도록 피해 다니게 된다. 몇 년 전에는 동네 마트 시식 코너에서 버섯을 두 차례 먹었다는 이유로,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우리 반 학생에게 "선생님 왜 두 개나 드세요?"라며 놀림을 받은 웃지 못할 헤프닝도 있었다.
연예인이 사생활 공개를 꺼리듯 지나친 관심을 받는 요즘 선생님의 모습도 비슷하다. 동료 선생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개인번호를 공개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간혹 업무용 휴대전화를 따로 쓰는 분도 있다고 들었다. 학생·학부모의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늦은 밤이나 사적으로 연락을 받게 되면 서운함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의 권위적인 선생님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렇게 편한 선생님 역할은 교사들에게 부담인 셈이다.
요컨대 옛날에는 너무 멀었고 지금은 너무 가깝다. 학교에서도 수요자 중심교육이라고 학생들의 편만 들어 맞추다 보면 선생님은 친구같이 편한 존재가 되기 쉽고, 결국 20명 남짓뿐인 작은 사회가 통제되지 않는다. 반대로 학생을 사무적으로만 대하면 공감대가 사라지고 교사로서 사명감보다는 직장인으로서 업무가 강조되는 듯한 느낌이다. '모두에게 친절할 필요는 없다'라는 말이 명언처럼 들리는 요즘이지만 결국 선생님과 학생 간 거리는 업무 이상의 저기 어디쯤 있지 않을까 싶다.
다시 화면을 들여다보며 아까 적은 메시지에서 '밤늦은 시각에 연락하는 것은 실례란다'라는 앞부분을 삭제하고 '꼭 일기장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라고만 적어 전송 버튼을 누른다. 학생의 답장은 없다. 메신저의 경고문구처럼 친구로 등록되어 있지 않으니 소심한 선생님이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마음 단단히 먹고 주의해야 했을까? 감사하다는 답장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서글픈 잠자리가 될 것 같다.
김학렬 월평초등학교 교사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