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현근 대전대 행정학과 교수 |
대한민국 지방행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행정 패러다임은 고전적(古典的) 행정, 신공공관리(New Public Management), 신공공거버넌스(New Public Governance)로 분류할 수 있다. 고전적 행정은 선거민주주의와 관료제 기반의 행정을 강조한다. 1970년대까지 지배적 관점이던 고전적 행정은 시민 역할을 정치적 대표를 선출하는데 국한한다. 선출된 대표는 시민을 대신해 정책을 만들고 관료조직을 통제한다. 하지만 정치인과 관료가 주인-대리인 관계를 망각하고 자신들의 게임에만 몰두하면서, 고전적 행정은 정치·행정 과정에 대한 시민의 좌절감과 국가기관 불신을 키워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80년대까지 대한민국 사회에서 흔하게 경험했던 정치인과 관료의 권위주의, 절차와 규칙에 매몰된 형식주의, 칸막이 행정, 행정의 불투명성, 공급자 중심의 일률적 서비스 등이 대표적인 역기능으로 지적된다.
신공공관리는 1980년대 전후로 시장의 경쟁과 고객 원리를 공공부문에 접목해서 행정효율성과 성과를 향상하는 프로젝트로 등장한다. 기업의 관리기법을 응용한 정량적 성과 측정과 경쟁적 유인제공, 민간조직 위탁을 통한 비용 절감과 서비스 향상이 강조된다. 유권자에 불과했던 시민은 다양한 공공서비스 향상 기법을 통해 '고객'의 위상을 부여받는다. 신공공관리 처방은 90년대 지방자치제 부활과 함께 지방정부 혁신의 단골 소재가 되어왔다. 하지만 신공공관리는 경쟁적 성과관리로 인한 협력문화의 상실, 비계량적이고 비경제적인 가치의 경시와 같은 역기능을 초래한 것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고객의 권리만을 강조하면서 공공선과 사회적 책임에는 무관심한 이기적인 시민을 키웠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1세기 행정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은 신공공거버넌스는 현대사회 환경 변화에 주목한다. 기후변화 또는 코로나19와 같이 높은 복잡성과 불확실성의 현대 사회문제는 단순한 사회에서나 유효했던 대의제와 관료제의 하향식 해법을 거부한다. 고약한 현대 사회문제는 '전체사회'(whole of society)의 협력적 대응 역량과 동력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 시민사회 및 공공부문 행위자들의 협력적 상호작용을 통한 신뢰 형성과 문제해결을 위한 유연하고 민첩한 파트너십 구축이 강조된다. 궁극적으로 지방정부 역량은 공공문제 정의와 해법을 놓고 다양한 부문 주체들이 함께 토론하고 학습하는 기회의 장이 되면서 실제 문제해결에 필요한 자원과 지식을 동원할 수 있는 실용적이고 수평적이며 상향적인 협력적 네트워크 구축과 직결된다.
신공공거버넌스는 '적극적 시민성'을 갖춘 시민상(像)을 지향한다. 적극적 시민은 일상의 공공문제 해결 과정 참여를 통해 공공선(公共善)의 책임 의식을 키우고 소통과 관용의 시민 덕성을 실천하는 시민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알려진 미국 하버드대 마이클 센델교수는 지방정부 주도로 시민 덕성을 키울 수 있는 장(場)을 여는 것을 '형성적 정치'(formative politics)라 부른다. 상향적인 토론과 학습의 네트워크 구축과 '형성적 정치'를 대표하는 보편화된 제도가 주민참여예산제 또는 공동체계획(community planning)이다.
민선 8기 대전시정 모습은 과거 권위주의 행정으로의 회귀를 의심할 정도다. 새로운 시정 출범 직후 내려진 주민참여예산제와 마을공동체계획 예산의 삭감 조치는 시대정신 반영은 고사하고, 모든 것을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나누고 선택을 강요하는 중앙정치 색안경의 구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결정이다. 대전시 전체사회 역량을 아래로부터 탄탄하게 다져가며 현대사회 도전에 맞서려는 전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지속가능한 대전의 내생적인 발전을 위해 실용적이고 포용적인 지방 정치와 행정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 중앙정부 의존적이고 이념적 정치색이 강한 이장우 시장의 '새로운 그랜드 비전'이 어떤 모습을 띨지 자못 궁금해지고 우려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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