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충남대 에너지과학기술대학원 교수 |
전쟁 중 의미를 가진 유사한 유래를 가진 날이 10월 5일 부산 시민의 날이다. 임진년(1592년) 4월14일 일본군의 부산포 에서 시작된 전쟁에서 조선은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5월 3일 한양, 6월 평양을 내준다. 일본군의 진군이 하루 30km 이상으로 전쟁 초기는 얼마나 일방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6월이 되면 전황은 관군이 아닌 의병과 수군에 의해서 전환점을 맞는다. 이순신 장군의 첫 전투가 5월 7일 옥포해전이다. 근래 한 정치인이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의 지휘 내용(勿令妄動靜中如山)을 인용하기도 했지만, 지켜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산과 같은 신중함으로 표현되었지 않았을까! 임금의 몽진 소식을 접하면서도 사천, 당포, 율포 등 크고 작은 해전을 승리한다. 7월 8일은 고심 끝에 나온 학익진으로 적선 100여척을 침몰시켜 한산대첩을 대승으로 이끈다. 해류와 지형, 피아의 전력 등 제조건을 세밀히 분석한 결과였을 것이다. 이 전투를 계기로 전쟁이 양상이 바뀌었다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명, 일본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전투의 패장이었고, 토요토미의 심복이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자신의 가문의 기록(脇坂記)에서도 이순신 장군과 이날의 기록들을 생생히 남겨 교훈으로 삼고 싶었다 한다. 한산대첩으로 제해권을 장악한 조선 수군이 부산포에서 정박한 일본 수군 본진을 선제 공격하여 한산대첩보다 많은 120척 이상의 적선을 격파하여 대승을 이끈 날이 음력 9월 1일로, 양력으로 환산하면 부산 시민들이 그 의미를 기리고 있는 10월 5일이다. 물론 여러 후보안들 중에서 의미에 맞게 택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경험자가 직접 작성한 기록의 경우, 그 무게감이 다르다. 임진난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도체찰사로 명군과도 창구였던 류성용의 징비록, 또 앞서 언급했던, 이순신 장군을 가장 증오하지만, 또 가장 존경/흠모했다는 와키자카의 가문기록들이 그런 것이다. 전쟁의 와중에서 고민하는 인간 이순신이나 자존심으로 똘똘 뭉쳤던 사무라이 와키자카의 무력감이 느껴진다. 무신이었던 두 사람과 달리 문신이었던 류성용의 경우, 종전과 함께 삭탈관직되어 귀향한 후, 시경에서 따온 지난 잘못을 삼가 경계하라는 의미의 징비록(懲毖錄)을 남긴다. 전후복구에 참여하거나 논공하여 공신이 되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징비록에는 지난 7월 필자의 컬럼에서 언급되었던 전쟁가능성을 부정했던 조선통신사 김성일에게 확인하는 장면이나 일본사신들의 태도변화 등 징후에 대한 분석도 등장한다. 권력을 위해 이런 의견들을 무시했던 선조도, 지방현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7단계 파격적 승진을 승인했다. 절로 가슴을 쓸어 내려지는 대목이다. 물론 류성용의 추천이다. 유출금지했다고는 하나, 이내 징비록을 입수한 일본에서는 다양한 버전으로 업데이트되며 100년 이상 베스트셀러가 된다. 청백리였던 류성용이 벼슬까지 사양하며 조선에게 주는 싶은 교훈이었건만 일본에 더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임진왜란으로부터 400여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지난 잘못을 삼가 경계하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 임진왜란으로 정권이 무사했던 조선의 무사안일이 40년후 병자호란, 300년후 경술국치를 자초한 건 아닌지, 그리고 나서 다시 100여년이 흐른 최근에 상기해야 할 교훈은 없는지 말이다. 지구온난화 한계 온도, 기후변화로 생기는 자연재해 등의 본 컬럼의 주제로부터 생각을 정리해 본다. 우크라이나를 비롯, 최근의 전쟁을 목격하며, 그 비참함을 절대 부인하진 않으나, 지난 잘못을 삼가경계하는 게 꼭 전쟁만이겠는가?
김성수 충남대 에너지과학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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