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우 대전향토문화연구회 회장 |
수년 전 가을 무렵, 대청호반의 시퍼런 호수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백발 성성한 어르신의 사연이 궁금해 여쭤본 적이 있다. 어르신은 "물에 잠긴 용계동이 고향이었고, 그리움에 호반 아래 고향을 쳐다본다"고 답했다. 그동안 대청댐이 완공되고 물이 차오르자 고향을 떠나 수도권으로 옮겨 정신없이 살았다는 어르신은 이제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조상 대대로 살던 정든 고향이 그리워 가끔 이곳을 찾는다고 하였다.
남북이 분단된 우리 현실에서 명절이 찾아오면 고향을 떠나온 이산가족들은 두고 온 고향의 가족과 산천이 그리워 애태우며 눈물을 짓는 이들이 많다. 그분들은 통일이 되면 고향을 다시 찾아볼 수 있는 꿈이라도 꿀 수 있지만, 수몰지구 이주민들은 대청호 물을 다 퍼내기 전에는 고향을 다시 밟을 수 없는 현대판 실향민이 됐다.
필자는 대청호 수몰 지역에 외가가 있어 어렸을 적 추억과 그곳의 풍광이 아직도 생생하다. 요즘도 물속에 잠긴 외갓집을 찾아가는 꿈을 꾸곤 한다. 60·70년대 외갓집을 갈 때는 대흥동이나 대전역 앞 정류장에서 시외버스를 타야 했다. 회인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도중에 인동시장을 거친다. 장을 본 사람들이 가득 탄 버스 안은 북적거렸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의 정보교류 장이 되기도 했다. 시장에 참외를 내다가 판 이야기, 담배 농사 수매 이야기, 장바구니 밖으로 비쭉 내민 동태 대가리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재밌게 듣던 기억이 난다.
버스는 판암동을 지나 세천고개를 넘어 비포장도로인 회인으로 접어든다. 주안천을 따라 조금 가면 동면 장터가 나오고, 몇몇 사람이 내린 후 모래재를 넘으면 탑산에 이른다. 탑산의 큰 느티나무 아래에는 빛바랜 충암 김정 선생 부인 송 씨의 '정녀'가 버티고 있어 무섭기도 했다. 탑봉 너럭바위 밑에는 금강이 굽이치는 소용돌이에 해마다 여러 사람이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을미모텡이를 돌아 배말(주촌리)에서 흘러나오는 개울 다리를 건너면 '쇠똥말랑'(여름 홍수에 금강이 불어나 소를 메어놓은 언덕까지 물이 차 소똥이 젖어 말랑거린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나온다. 그곳에서 버스를 내리면 버스는 휘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어부동 쪽으로 사라진다. 금강 변의 하얀 모래사장의 물새 소리만이 시골의 적막을 깬다. 우람한 멋진 노송이 몇 그루 서 있는 창말동네를 지나 우무깨(우무동)로 가는 삼거리를 지나면 잘 가꾼 담배밭이 보이고, 물뱀과 잠자리가 많은 둠벙을 지나 팽나무 거리가 나온다. 동내 아이들은 나무에 올라 팽나무 열매를 씹기도 하고 열매를 던져 지나는 사람을 맞추기도 했다. 조금 더 가면 마을의 비보 숲인 장승거리가 나오고 장승 역할을 하는 문인석 하나가 서 있었다. 이어 국사봉이 나타나는데, 광산김씨 집성촌인 안골마을 냇가를 따라가면 흙벽의 담배건조장이 보이고 개울가 공동우물을 지나 돌담길 마지막 집이 외갓집이었다. 오느라 힘든 몸으로 외갓집 사랑채에 누우면 담장 밖 밭을 가는 농부가 늙은 소와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랴. 워워, 으쯔쯔~" 조금 떨어진 시골 방앗간의 발동기 돌아가는 '통통통'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었던 유년의 추억이 생생하다.
아름다운 대청호에는 수많은 마을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물속에 잠들어 있다. 댐 건설로 정든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도시의 빈민으로, 서해안 간척지 등으로 이주하여 힘든 삶에 고향을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이제 백발이 되어 인생을 되돌아볼 시점에 고향 인근을 찾아도 그들이 돌아갈 고향은 없다. 고향은 이미 시퍼런 대청호 깊은 곳에 용궁이 되어 과거의 가슴 시린 추억을 되새기고 있을 뿐이다.
대청호는 호반 둘레길 등 시민들의 명소가 되었다. 이제 아름다운 경치에 가려진 수몰 지역 마을과 그곳에 살았던 주민들의 전설 같은 이야기에 관심을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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