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공론] 무용 '사유의 길'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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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공론] 무용 '사유의 길'을 보고

장주영/ 대전도시과학고 교사, 평론가

  • 승인 2022-09-13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사유(思惟)란, 생각하고 판단하고 추론해본다는 말이다. 인간의 가장 고차원적인 심적 능력으로 보편적인 것, 본질의 파악에 관한 이성 작용인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사유의 방>이라는 커다란 전시실이 있다. 이곳에는 삼국시대 국보인 반가사유상 두 점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데, 이를 관람하며 사유할 수 있도록 꾸민 방이다. 금빛의 미륵보살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리고 오른손으로 볼을 살포시 만지고 그윽한 얼굴을 하고 있다. 두 미륵의 온화한 미소는 1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최고의 표정으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심오하고 행복한 표정을 진정으로 지을 수 없단 말인가?

필자는 서울시무용단 정혜진 단장의 초대로 국립중앙박물관 공연장인 극장 '용'으로 향했다. 극장 '용'(사장 김용삼)에서 '사유의 길'이라는 제목의 공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창올림픽에서 행사를 주관한 팀(극작 박용재, 연출 한경아)이 기획·연출한 무용 공연이며, 전시실 <사유의 방>의 반가사유상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공연 '사유의 길'은 인간이 탐욕을 버림으로써 번뇌와 고통을 떨쳐내고, 반가사유상의 미륵보살처럼 해탈해가는 추상적인 과정을 무용으로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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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방>안의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안무를 구성한 정혜진 서울시무용단장은 반가사유상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기까지 깊이 있는 철학 세계에 대해 연구와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녀는 작품 '사유의 길'에 담긴 인생 철학에 대해 설명한다.

"인간은 생로병사의 인생 속에 탐욕, 분노, 교만, 슬픔이라는 고통의 다양한 감정에 휘둘리며 자유롭지 못하고 힘들어합니다. 태초에 만끽했던 자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행복하기 위해 무에서 유로 진행되는 업을 쌓는 인생길에서 고통이 생겨납니다. 괴로움의 근원은 소유하고자 하는 탐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탐욕의 무게에 짓눌려 숨가쁘지요. 욕망만큼 고통에 대한 중력도 커져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됩니다. 실패하거나 망해서 주저앉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때야 비로소 나를 되돌아보며 다른 관점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삶의 속도를 0으로 하고 멈춰야만, 그제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할까요? 드디어 삶의 의미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유'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이 보이고, 앞만 보고 달려오던 시절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하던 '사유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멈춤과 비움이라는 수행을 통해 드디어 '미륵'의 미소 띤 얼굴이 나오게 됩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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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길>의 자아
공연에서는 '자아'가 힘들어 주저 앉아 멈췄을 때, 자아는 제 각각의 감정들로 분리되며 네 명의 무용수의 몸짓으로 표현된다. 원하는 것을 갖고자 했던 '탐욕', 소유하며 늘어난 '교만', 채우지 못함으로 오는 '슬픔', 마음대로 되지 않았을 때 오는 '분노'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괴로움을 겪는 이유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속된 감정들은 사유를 통해 멈춤과 비움으로 와해되는데, 감정의 멈춤을 통해 사색을 한 자아는 내려놓음을 통해 홀가분해진다. 올바른 사유를 통해 내면을 더 큰 에너지인 맑은 빛들로 채우면서, 수수께끼처럼 아름답고 평온했던 미륵보살같은 미소가 내 얼굴에도 번지게 되는 것이다.

사유의 길이란, 인간의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알아차리고 끊임없는 수행과 의도적 비움을 통해 보살의 길을 발견해가는 여정인 것이다. 사유의 극치는 바로 현자(賢者), 또는 미륵, 즉 신과의 만남, 더 나아가 우주와 내가 만나 깨우치는 대화다. 이를 통해 번민과 고뇌를 줄이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아 진정한 행복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번 공연의 전체 연출을 맡은 한경아 연출가는 그녀의 창의성을 총동원하여 기량을 발휘하였다고 했다. 공연 무대는 관중석 가운데부터 무용수가 춤출 수 있도록 높고 기나긴 길이 연결되어 입체적인 T자 모양으로, 긴 동선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무용수를 다양한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감상 할 수 있었다. 극장 '용' 역사상 최초의 시도라고 한다.

천장 전체가 은하수 별빛으로 촘촘하고 어둠의 공간은 고요하고 여백으로 가득하다. 김상택 미술감독은 인간의 뇌 속에 존재하는 사유의 과정을 실제로 길로 형상화하여 미륵보살로 이르는 여정을 눈 앞에 펼쳐 보였다. 정구홍 조명감독은 그 길 위로 아름다운 별빛뿐만 아니라 무서운 먹구름, 깨달음의 천둥 번개, 사유를 통해 성장해갈 때 오로라 같은 신비로운 빛을 창조했고, 김성준 기술감독은 첨단 기술로 공연 전체의 완성도를 높였다. LED 미디어 영상아트, 홀가분한 새 출발과 비움을 의미하는 듯한 하얀 눈발 그리고 초현실적 사유의 공간을 하얀 안개로 연출하는 기술력이 돋보였다.

한편, 일반 무용에서 나오는 음악과는 사뭇 다른 점을 느꼈는데, 김태근 음악감독은 인간과 가장 친숙한 자연의 음향을 선호한다고 한다. 바람소리, 새소리, 나비가 꽃을 찾아다니는 자연의 소리로 시작해, 힘들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거친 숨소리로 표현했다. 욕망의 숨가쁨을 불규칙한 호흡으로, 명상 싱잉볼의 청아한 울림, 삶과 죽음의 길 위에서 자아 내면과 신과의 대화, 저음의 선율과 징소리, 탐욕을 내려놓을 때 흐르는 슬픈 대금소리, 공허한 듯한 겨울 바람소리, 깨끗한 눈을 밟는 뽀드득, 뽀드득 소리, 맑은 물소리 같은 원초적 소리들은 나머지 감각들과 완벽히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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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빠진 인간의 내면을 표현
감성과 철학을 총망라하여 담은 이런 종합예술을 어찌 탄생시켰을까? 많은 분야별 전문가들이 협업한 결과다. 심재훈 총괄제작감독의 지휘 아래 박연주 무대감독, 분장 강대영, 영상 송승규, PD 김보경, 조연출 안재린 등 지면상 모두 소개 할 수는 없지만, 최고의 공연 완성을 위해 뒤에서 숨은 노력을 한 장본인 들이다.

주인공을 맡은 무용가 장윤나와 네 명의 각기 다른 감정을 연기한 이예림, 노미진, 유지나, 박희주 무용가도 우리나라 무용계의 보물들로 흠잡을데 없는 최상의 춤을 선보였다. 오직 얼굴 표정과 몸짓만으로 메세지를 전달한 연기력은 관객들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몰입시켰다. 연기파 명배우 안석환이 미륵보살이자 현인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유일하게 목소리를 내는 화자였는데, 사유의 출발점에서 주인공에게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주인공이 보살의 여정으로 해탈해가는 마지막에 다시 등장하여 부드럽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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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와 분리된 감정 4인의 춤추는 모습
한편, 무대 의상을 구성한 디자이너 문희 작가는 탐욕을 표현해야 하는 의상을 창조하는 어려운 작업을 맡았다. 공연의 미친 존재감인 탐욕 덩어리를 형상화하기 위해 인간의 온 몸을 덮은 웅장하고 육중한 이미지를 상상했다. 나를 얽매고 속박했던 탐욕의 무게는 내가 걸친 무거운 옷과 같다.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춤을 춰도 찢어지지 않으면서 가벼운 내구성을 갖추어야만 했다. 그래서 최고급 한지로 외투를 만들었다.소유물을 담는 탐욕의 주머니도 외투 전체에 한지로 붙였다. 그래서 누비 코트처럼 울룩불룩하다. 옷 위에 '탐낼 탐(貪)'이라는 한자를 그려 넣었고, 초록, 다홍, 분홍 한지로 밧줄을 길게 꼬아 달았다. 색색의 밧줄은 놓지 못하는 속세의 미련일 것이다. 외투 전체에 무속인이 흔드는 방울을 실로 감아 튼튼하게 달아, 주인공 장윤나 무용수가 움직일 때마다 '딸랑딸랑'하며 울려 귀를 자극하고 혼을 빼놨다. 어깨부터 목덜미까지는 가벼운 움직임에도 나풀거리는 수백 개의 깃털을 꽃처럼 달았고, 피어오르는 탐욕을 의미했다. 주렁주렁 허영심이 달린 아름다운 욕망의 거적때기를 주인공이 힘겹게 내려놓은 뒤, 드러난 가늘고 가벼운 자아의 본질적 몸매는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반전이 된다.

네 명의 감정 자아들도 부각시키기 위해 머리에 흰 광채가 감도는 둥글고 큰 가면을 제작했는데 꼭 추석 보름달 같았다. 다섯 명 모두 가녀린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흰 드레스를 입어 몸짓이 옷에 가려지지 않고 오롯이 전달되었다.

의상 디자이너 문희(MOON-E)는 우리나라 유명 조각가이기도 하다. 그녀의 조각은 언제나 인문학적 의미를 전달하는 탁월한 작품성을 자랑해왔는데, 그래서인지 '사유의 길' 공연에서도 조각 같은 무대의상에 담긴 철학적 의미와 창의성이 잘 전달되었다. 추상을 시각으로 전달하는 무대 의상의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와 의상, 조명과 음악이 한데 어우러지며, 매우 특별하고 독창적인 안무가 쏟아졌다. 발걸음조차 뗄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황이 와, 더 걸어 나아가지 못하고 호흡곤란과 함께 멈추어 쓰러지는 무언의 몸 동작 연기가 압권이었다. 감정이 나오는 손가락과 눈동자, 팔이 그리는 곡선의 자취, 온 몸의 관절과 근육의 움직임이 예술로 승화되었다.

또 괴로움으로 구속받은 절규, 탐욕에 집착하는 경박스러움, 몸에 귀신이 붙은 듯 자유롭지 못하고 아픈 모습, 탐욕을 힘겹게 끊어내는 결연함, 멈추고 사유하는 초연함, 비운뒤 자유로운 온화함을 제 각각 창조적 몸짓으로 발현했다. 무용수 또한 번뇌하는 중생의 모습에서 시작하여 맑고 엷은 미소를 띈 미륵의 모습으로 점점 변신해가며 천둥 번개와 함께 초현실적인 깨달음 상태를 표현한 춤은 작품의 방점이었다. 나비처럼 자유로운 몸짓, 행복에 젖은 부드러운 걸음, 바람같이 흐르는 회전을 그리며 무대를 초토화 시켰다. 열연한 무용가들과 김성훈, 김진원 안무감독에게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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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에게 인사하는 무용수들과 배우 안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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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유의 길' 공연은 분야별 전문가 모두가 자신의 역량을 최대로 발현하고, 훌륭한 팀 정신으로 소통하여 전문성을 뛰어넘는 고차원 융합으로 형이상학적 개념을 구체화하였다. 새로운 시도에도 소신을 밝히고, 과감하게 도전했던 것이다. '사유의 과정'이라는 추상의 세계를 감각의 세계로 형상화하여 무대에 파격적으로 선보인 창조적 예술성과 도전 정신에 경이로움과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공연을 보고 난 후 필자도 미래에 독(毒)이 되는 오늘의 집착이 무엇이 있나 살펴본다. 훗날 미간 사이가 찡그린 불행에 쌓인 얼굴로 갈 것이냐, 미륵보살처럼 시대를 초월한 미소를 가진 미인이 될 것이냐는 사유해보면 알 것이다.

장주영/ 대전도시과학고 교사, 평론가

장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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