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톡] 천하무적에 무슨 씨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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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톡] 천하무적에 무슨 씨가 있나

남상선 /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전 조정위원

  • 승인 2022-09-02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달포 전에 선산 벌초하는 날을 9월 8일로 잡았다. 이날은 전국 각지에 있는 형제들이 다 함께 모여 그 동안 못 다한 형제애를 나누며 조상님 산소 풀을 깎는 날이었다. 이 날은 아마도 길운으로 통하는 좋은 날인지 벌초하는 집도 많고, 각종 행사 일정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것 같았다.

이 날은 교직동료 선생님의 장녀 결혼식에 대학은사님의 출판기념회까지 겹쳐 있는 날이었다. 분신술을 쓴다 해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고민하다 동료선생님 여혼에는 인터넷 뱅킹을 통하여 마음을 보냈고, 은사님 출판기념회 자리는 대학 동기한테 부탁하여 마음을 전했다.

5형제가 8일 벌초 때문에 7일 날 고향 셋째네 집에 다 모여 잤다. 나만 약속된 봉사활동 일정으로 자리를 함께하지 못했다. 나는 새벽에 차를 끌고 간다고 얘기를 해 두었다. 사흘 후에 셋째한테서 전화가 왔다. 차 윤전 불안하니 차 놓고 버스로 천천히 오라는 내용이었다. 차 몰고 오지 말라는 소리가 채 여운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서울 막내한테서 또 전화가 왔다. 동생들만 해도 빨리 끝낼 수 있는 일이니 천천히 오라는 당부였다.

동생들의 형을 걱정하는 염려의 말이 고맙기도 했지만 벌써 노인 대접을 받는 것 같아서 씁쓸한 기분이었다.



동생들만 땀 흘리게 할 수 없어 새벽 6시에 승용차 시동을 걸었다. 아침 7시 20분 경에 도착했다. 벌써 동생들은 선산에 가 예초기를 돌리고 있었다.

9월 8일 예초기의 풀 깎는 앵앵거리는 소리는 우리 집만이 아니었다. 사방의 이 산 저 산은 예초기의 앵앵거리는 소리로 요란했다. 지상에서 숨을 쉬는 가족이면 뉘 집 할 것 없이 십중팔구는 조상님을 위한 위대한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이 소리가 조상님들을 위한 기특한 소리가 아녔다면 하늘의 청천벽력으로 혼쭐이 나도 크게 났을 것이다. 하늘의 노여움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천지사방에서 메아리로 울려 퍼지는 예초기의 앵앵거리는 소리는 현악 3중주, 4중주 악기소리를 방불케 했다. 조상님들을 위하는 아름다운 소리였기에 짜증나지 않는 소음으로 들리지 않았으리라.

효도를 하느라 내는 소리였기에 아름다운 소리로 들렸음에 틀림없었으리라.

8일날 우리 향제들이 정담을 나누며 단합된 모습으로 벌초하는 모습을 보니 초상집에서 보았던 의좋은 10남매 생각이 났다. 일사불란할 정도 단합된 모습으로 벌초하는 형제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니,10남매가 부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짚모자를 쓴 막내와 셋째는 그 힘든 예초기를 지고 어려운 줄도 모르고 억센 억새풀과 잡초를 베어내느라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요추협착증으로 허리 시술을 받았던 둘째와 환갑 나이가 된 넷째는 갈퀴를 들고 베어낸 잡초를 열심히 긁어가며 산소 주변의 쑥과 자디잔 상수리나무를 뽑아내고 있었고, 척추 수술로 장애 등급을 받은 다섯째는 육철낫을 들고 산딸기 가시덤불을 비롯한 기타 잡동사니 자질구레한 풀을 깎아 내고 있었다. 나도 갈퀴질을 하면서 쉬엄쉬엄 호미를 들고 잡동사니 나무뿌리 풀뿌리를 캐냈다.

작년에 예초기를 등에 지고 있는 동생이 힘들고 안쓰러워 보여 내가 좀 해보겠다고 했다가 형님은 안 된다는 강한 거절에 이번엔 좀 손쉬운 갈퀴질 호미질에 베어놓은 풀 더미를 한 쪽에 모아 놓는 일만 했다. 선산 벌초할 공간이 넓어서 상당 시간이 소요될 줄 알았는데 6형제가 합심해서 줄여나가니 단시간에 끝났다.

화기애애하게 일치단결된 형제들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보기 좋았다.

오늘 6형제가 서로를 배려하고 합심하여 벌초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원감이었다.

땀을 흘리면서도 형은 아우를, 아우는 형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예초기를 지고, 갈퀴와 호미질을 하고 또 육철낫을 들고, 땀 흘리는 모습은 형제애가 그대로 숨 쉬고 있는 한 폭의 평화경(平和景)이었다. 어머니 한 젖 먹고 자란 형제들이라 그런지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역시 어머니의 젖의 위력은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천하무적(天下無敵)은 전쟁을 할 때에 용장(勇將)과 용맹스런 병사들이 적과 싸워 좋은 전과(戰果)를 올렸을 때 대적할 상대가 없는 줄로만 알았다.

아니, 지피지기(知彼知己)하는 군대들이 백전백승(百戰百勝)할 때에 거기서 나온 용어인 줄만 알았다. 헌데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역시 천하무적은 우러러 볼만한 대단한 존재였다. 전쟁에서 천하무적은 동경의 대상이고 굉장한 것이었으리라. 천하무적 이 단어는 특별한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범상한 보통 사람에게도 쓰일 수 있다니 대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우리 형제들이 그저 범상한 장삼이사(張三李四)로만 알았는데 벌초하는 모습을 보니 새로운 감(感)이 오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은 우리 형제들이 천하무적에 해당하는 동기간이라는 사실이었다.

얼마 전 상가에서 본 10남매가 천하무적을 떠올리게 했는데 우리 형제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가에서 본 10남매가 그렇게 화목하고 단합된 모습으로 고인을 편안하게 보내드리는 모습에 그들을 천하무적의 10남매라 칭찬을 하고 집에 왔는데 우리 형제들이 그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제들이 화기애애한 형제애로 땀 흘리는 모습을 보니 주세붕의 오륜가가 떠올랐다.

兄(형)님 자신 져즐 내조쳐 머궁이다.

어와, 뎌 아우야 어마님 너 사랑이아

兄弟(형제)옷 不和(불화)하면 개 도티라 하리라.

(형님이 먹은 젖을 나까지 먹습니다.

아아, 저 아우야 네가 먹는 젖은 어머님의 사랑이란다.

형제간에 화목하지 못하면 남이 개돼지라 할 것이니라.)

어머니의 한 젖을 빨고 자란 우리 형제들이 위대해 보였다.

어머니께서 당신의 젖으로 주신 교훈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지나도 변할 줄 모르는 형제들의 마음이 지극히 자랑스러웠다.

어머니 젖의 위력은 천세 만세를 지나도 칭송을 다함이 없을 것 같았다.

화목과 형제애로 단합된 혈육이니 뉘 감히 천하무적이라 하지 않으리오.

천하무적에 무슨 씨가 있나!

왕후장상(王侯將相)에 씨가 없듯이 천하무적에도 씨가 없는 것이다.

혈육의 정으로, 형제애로, 똘똘 뭉치면 그게 바로 천하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6형제가 바로 천하무적임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작년에 극성을 부리며 형제들을 위협했던 말벌도 땅벌도 왕텡이도 보이지 않았다.

천하무적 우리 6형제들이 무서워 피신한지도 모르겠다.

남상선 /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전 조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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