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신사임당 그림 <묵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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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신사임당 그림 <묵포도>

양동길 / 시인, 수필가

  • 승인 2022-09-02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결혼과 함께 자신만의 고유성이 사라지고 새로운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둘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는 당연지사이나 고유성이 사라지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다. 하나만 예를 들자면, 결혼과 함께 남편 성을 쫓는 서구문화나 '누구 엄마'로 불리고 이름이 사라지는 우리 문화다. 물론, 이름을 존귀하게 여겨 함부로 부르지 않는 전통적 관념도 내포 되어있을 것이다. 청소년기에 누구나 한번쯤 갖는 의문 아닐까? 남녀 누구나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받고 존중되어야 할 부분 아닐까? 정확히 모든 연유가 기억나지 않지만, 필자에게도 그런 고민이 있었던 것 같다. 때문에, 결혼하면서 흔히 쓰는 여보나 당신, 자기 같은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누구 엄마라고도 하지 않는다. 이름을 불렀다. 아내 역시 거부하거나 잘못되었다는 표현이 없어, 결혼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종일관 이름으로 부른다.

이해와 배려, 수용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경우를 종종 본다. 변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항상 사안을 바라보는 견해와 입장차가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대립이 갈등만 증폭 시킬 뿐 문제해결에 도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선전선동으로 집단의식 변화가 강제되기도 한다. 일시적 변화가 이루어지기도 하나, 자연적이지 못한 것은 원래 상태로 환원되거나 더 좋은 방향으로 진보한다. 괜한 노력과 시간만 허비는 것이다.

남녀의 성정체성이나 갈등도 마찬가지다. 대립이 아니라 인식을 같이 하는 것이 먼저다. 잘못을 시정하거나 더 나은 쪽으로 변화해야 의미 있는 것 아닌가?

역사 속의 사회는 대부분 남성 중심이었다. 참여와 활동, 기준과 서술 모두 남성 중심이다. 여성이 주체인 경우는 보기 어렵다. 미술사도 다르지 않다. 활동이 없으니 기록도 없겠지만, 대가라 할 여성 작가는 찾기 어렵다. 그러한 측면에서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 ~ 1551, 화가)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묵포도
신사임당 작, 묵포도, 비단에 먹, 31.5×21.7cm, 간송미술관
신사임당을 모르는 사람이 있으랴? 우리 모두 가슴에 품고 다니기 때문이다. 지폐 인물로, 그가 그린 <묵포도>, <초충도>, 어몽룡의 <월매도>, 이정의 <풍죽도>와 함께 5만 원 권에 도안되어 있다. 아들 이이(李珥, 1536 ~ 1584, 유학자)는 5천 원 권 인물이다. 몇 종 되지 않는 우리 지폐에 모자가 함께 등장하는 것도 세계사적 별난 일이다.

사회 활동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시대, 대표적인 당대 여성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출가외인이었던 시대에 시댁과 친정 양가를 잘 보살폈으며, 자녀 교육에도 으뜸이었다. 행동과 실천으로 모범을 보였으며,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어머니에게 감화를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진 셋째 아들 이이가 그를 대변해 준다. 심지어 남편도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였다. 능동적인 자세로 가정을 이끈 것이다. 학문의 기회도 턱없이 부족하던 시대에 시서화 모두에 능했다. 그림은 생시에도 명성이 자자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무엇보다 정체성과 주체성을 모두 살린 그의 삶이 아름답다.

관점이 다를 수도 있다. 정치적 의도가 있었으리라 추정되지만,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 ~ 1689, 성리학자)도 신사임당을 높이 평가한다. 화가 보다는 대학자 율곡의 어머니로서 돋보이도록, 국가적 행사로 추앙하자는 의견도 개진한다. 1676년 신사임당 산수도에 발문으로 덧붙인 글이다. "신 부인의 어진 덕이 큰 명현을 낳으신 것은 저 중국 송나라 때 후부인이 이정(二程) 선생 선생을 낳은 것에 비길 만합니다. 후부인의 행장에 의하면 부인은 '부녀자들이 글이나 글씨를 남에게 전하는 것을 마땅치 못하게 여겼다' 했는데 신부인의 생각도 그와 같았을 것입니다."(한국사 인물열전)

그림은 <묵포도, 신사임당, 비단에 먹, 31.5×21.7cm, 간송미술관>이다. 워낙 잘 알려진 작가이다 보니 전칭작이 많은데, 이것은 진품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크지 않은 그림이지만, 포도의 특징이 잘 묘사되어있다. 몰골법으로 그린 포도 알이 먹의 농담으로 탱글탱글한 질감과 입체감이 살아난다. 또한 알갱이마다 각기 농도를 달리하여 익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포도의 덕성이랄까, 서로 다른 알갱이가 모여 송이가 됨도 깨닫게 해준다. 포도 잎의 묘사도 빼어나다. 얼마나 다양한 먹색의 연출이 가능한지 잘 보여준다.

고유의 정체성이 독립된 인격체로서 중요하다. 그런 개체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것 역시 중요하다. 함께여서 행복한 세상이다. 미래사회는 여성성이 더 요구되는 시대라 한다. 소위 여성성으로 알려진, 상냥하고 온화함, 감정이입,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 개인보다 협동, 전투나 경쟁보다 평화추구 등의 가치가 더 빛을 발하는 시대라 한다.

함께 가는 것이 무엇일까? 논어 이인편에 나오는 증자의 말이다. 충서는 "자기마음을 다하는 충이라 하고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게 하는 것을 서라 한다.(盡己之謂忠 推己之謂恕)"이다.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나를 미루어 남을 생각하는 것이다. 다투기 보다는 작은 하나라도 실천하는 것이 소중하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양동길
양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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