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공론] 플라스틱 옷장, 낡은 것의 소중함

  • 오피니언
  • 문예공론

[문예공론] 플라스틱 옷장, 낡은 것의 소중함

연두흠 /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8-25 16:00
  • 신문게재 2022-08-26 18면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원래 난 깔끔하고 심플한 디자인에 화이트나 그레이의 모노톤 컬러의 가구를 좋아한다. 썩는 데 500년 이상 걸린다는 이 플라스틱 옷장! 흰색의 기본 뼈대에 서랍 색깔은 연보라색의 촌티 나게 생겨 참~ 맘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아내에게 이 옷장을 버리고 온다 말해도 그럴 때마다 아직 쓸 만하다며 신경 쓰지 마라 말한다. 쓰레기 분리수거 일에 맞춰 내려다 놓으면 재활용 산업체에서 알아서 처리해주는 것을 집 분위기에 맞지 않는 옥에 티 같은 이 플라스틱 옷장이 눈에 가시처럼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다.

댐핑레일이 있어 부드럽게 닫히고 심플하면서 고급스런 옷장도 많은데 딱 봐도 싸구려처럼 보이는 이놈의 옷장은 댐핑레일은 커녕 서랍을 열고 닫을라치면 온 몸을 흔들어 대며 춤을 춘다. 특히 레일이 없어 서랍을 열 때 힘 조절을 못하면 서랍장이 끝까지 빠져나와 바닥에 나뒹굴어진다. 정리해놓은 양말과 속옷들이 이때다 싶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침대 밑이나 화장대 밑으로 은폐 엄폐를 하는 것이다. 이놈의 옷장은 주조 방식으로 매우 단조롭게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이음새도 하나 없어 박살낼 약점과 틈도 없는 방어력 꽤나 견고한 녀석이다.

이놈의 옷장은 10년 전 배재대학교 유학생이 귀국하기 전 사용하다 버리기가 아깝다 해서 아내가 던킨도너츠로 성의 표시를 하고 차에 싣고 왔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당근마켓과 번개장터와 같은 직거래도 없을 때였다. 그 뒤로 우린 다섯 번이나 이사를 했고, 이사를 할 때마다 아내에게 말을 했지만 아내는 아직도 쓸 만하다며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잘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오늘 아침 아내에게 '저 옷장 참 오래 됐다~ 못생긴 게 자기 밥값은 한다고 10년 동안 안방 떡~ 차지하고 있는 게 진짜로 자존감 높은 놈이네' 라고 말했다. 아내는 빙그레 웃으며 아침식사 준비를 위해 주방으로 갔다.



고급스런 가구와는 거리가 먼 촌티 팍팍 나는 5단 서랍장. 5만 원도 채 안돼 보이는 싸구려 플라스틱 서랍장. 골동품이 돼버린 흠집 많고 색 바랜 플라스틱 수납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100cm도 채 되지 않았던 우리 아이들이 니 놈에게 많은 신세를 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183cm이상 훌쩍 커버린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한 플라스틱 옷장에게 말이다.

'낡은 물건은 좀 버리시고 좋고 새로운 것으로 다시 사세요.' 이처럼 살아생전 아버지께서는 종종 할머니께 말씀하셨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다 쓸모 있는 것들이라 말하시며 버리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에겐 아마도 나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 많았을 것이다.

'아빠 곰은 뚱뚱해/ 엄마 곰은 날씬해/ 애기 곰은 너무 귀여워/히쭉히쭉 잘 한다'

애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면서도 아빠 곰은 뚱뚱하다는 부분이 싫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난 실제로 뚱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엄마 곰은 날씬해' 라며 약 올리며 웃는 아내가 얄밉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난 아빠가 아니었던 것 같다.

집안을 둘러보니 아내는 아이들과 어릴 적 함께했던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것도 저것도… 누구에게는 소중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오늘 비로소 알게 됐다. 그래서 태어나 처음으로 무기물에게 '고맙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어졌다. 일순간 내 머리를 의심했지만 '원효대사도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지 않았던가!' 아마 원효대사도 해골에 대해 감사함을 표현했으리라~

나는 미안함에 그리고 감사함에 용기를 내어 '고맙다'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부엌에서 '뭐가요?'라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ㅎ ㅎ 옷장과 나와의 비밀이 생긴 것이다. 할머니와 손자, 아내와 아이들의 추억을 담은, 그래서 더 소중한 비밀을 알게 된 것처럼.

"아버지 저도 이제 나이 먹나 봐요… 오늘 낡은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됐네요."

연두흠 / 칼럼니스트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학대 마음 상처는 나았을까… 연명치료 아이 결국 무연고 장례
  2. 원금보장·고수익에 현혹…대전서도 투자리딩 사기 피해 잇달아 '주의'
  3. 김정겸 충남대 총장 "구성원 협의통해 글로컬 방향 제시… 통합은 긴 호흡으로 준비"
  4. [대전미술 아카이브] 1970년대 대전미술의 활동 '제22회 국전 대전 전시'
  5. 대통령실지역기자단, 홍철호 정무수석 ‘무례 발언’ 강력 비판
  1. 20년 새 달라진 교사들의 교직 인식… 스트레스 1위 '학생 위반행위, 학부모 항의·소란'
  2. [대전다문화] 헌혈을 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3. [사설] '출연연 정년 65세 연장법안' 처리돼야
  4. [대전다문화] 여러 나라의 전화 받을 때의 표현 알아보기
  5. [대전다문화] 달라서 좋아? 달라도 좋아!

헤드라인 뉴스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시와 충남도가 행정구역 통합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장우 대전시장과 김태흠 충남지사, 조원휘 대전시의회 의장, 홍성현 충남도의회 의장은 21일 옛 충남도청사에서 대전시와 충남도를 통합한 '통합 지방자치단체'출범 추진을 위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했다. 대전시와 충남도는 수도권 일극 체제 극복, 지방소멸 방지를 위해 충청권 행정구역 통합 추진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대를 갖고 뜻을 모아왔으며, 이번 공동 선언을 통해 통합 논의를 본격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공동 선언문을 통해 두 시·도는 통합 지방자치단체를 설치하기 위한 특별..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