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 고비 어려울 때 마다 은인들이 나타나 생명을 이어주고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워 다시 길을 걷게 해 준다.
8월 17일(수) 나는 늘 가슴속에 묻어 두고 살았던 50년前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 이셨던 이상귀 은사님을 뵙게 되었다.
세월을 헤아려 보니 반세기가 지난 50년의 시간이 흘렸다.
1972년 11월 서울 배명중학교 3학년 때 수업료를 내지 못해 졸업을 못할 처지에서 은사님께서 대납을 해 주셔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때 우리 집 형편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는데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별세로 우리가 받을 것은 못 받고 받을 사람들만 나타나 이것저것 해결하고 보니 정작 수업료 낼 돈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먼저 담임선생님께 부탁을 해보고 여의치 않으면 교장선생님을 찾아 뵙고 어떻게 하든지 졸업은 해야겠다는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방과 후 담임선생님 집을 찾아가 애절한 마음으로 부탁을 드리니 선생님께서는 나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열심히 공부해서 국가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빌린 수업료는 꼭 갚아라!"
나는 고맙기도 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도망치듯 얼른 선생님 집을 나와 우리 집으로 빠른 발걸음을 옮겼다.
세월의 강물은 도도히 흘려 그렇게도 선생님께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지만 너무나 평범한 범부로서 은사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15년前 나는 은사님을 찾기 위해 모교에 연락을 했고 마침 필자를 기억하고 계신 교장선생님의 도움으로 은사님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그때 은사님은 대전 보건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고 계셨다.
은사님과 통화를 하고 그동안 SNS로 소식을 주고받던 중 모 신문사에 기고한 나의 글 '孝와 생명 방정식'을 보내 드렸다. 글의 내용은 옛날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3년 시묘살이를 하면서 슬퍼하는 것보다 돌아가시기 前 정성을 다해 3년을 모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하늘이 준 나의 수명을 분배할 수 있다면 3년을 떼어서 어머니께 드려 그 3년 동안 어머니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는 바람의 글을 써 보았다. 글을 읽어 보신 은사님께서 연락이 왔다. "이 글을 가지고 우리 대전노인대학 회원들에게 강의를 해 줄 수 없겠느냐"라는 요청이셨다. 마침 대전시 노인복지관 노인대학장을 맡고 계신 은사님께서 강의 부탁을 해 주신 것이다. 나는 흔쾌히 동의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강의 준비를 하였다.
서툰 강의지만 성심껏 준비하기로 하고 차일피일 미루던 수업료를 전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 했기에 강의 날자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당일 날 광양지역에는 비가 내려서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광양에서 광주행 첫차를 타고 다시 광주에서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대전노인복지관을 찾았다. 그때 시간이 오후 1시가 다 되었다. 강의 시간은 오후 2시, 그때 저만치에서 은사님이 점심을 드시고 걸어오시는 것 이였다. 첫눈에 알아본 두 사람은 뜨겁게 인사를 나누고 나는 간단히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들렀다. 그리고 수업료가 든 봉투를 남몰래 드렸다. 은사님께서는 말없이 받아 주셨다.
준비해간 강의를 나름 최선을 다해 마치고 회원들과 아쉬운 인사를 나누며 밖으로 나왔다. 은사님께서도 조용히 따라 나오시며 주위를 살피시고 봉투를 하나 주셨다. '오늘 강의 고맙습니다. 노인대학장 이 상귀' 나는 몇 번 손사래를 쳤지만 끝내 봉투를 손에 집어 주셨다.
광양에 도착하니 저녁 9시경, 늦은 저녁을 먹으려니 은사님께서 전화가 왔다. "오늘 강의 정말 잘해 주셨다. 나는 수업료를 받았고 제자는 강의료를 받았으니 서로 기쁜 날 이였다. 먼 광양에서 대전까지 버스 타고 와서 열강해준 그 마음이 고맙다. 사업 성공하기 바란다." 나는 또 은사님께 마음의 빚을 지고 말았다. 세상은 이렇게도 아름다운 것이다. 훌륭한 은사님을 만난 필자는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이다.
나종년 / 전남도 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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