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일은 시시비비 논란 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용서받고 용서해주는 일이 거래처럼 돼서는 아니 된다.
우리의 주변에는 용서하면서 사는 사람도 많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용서하며 사는 사람 뒤에는 항상 평화가 따르고 함께하는 생성 조화하는 삶이 있게 된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용서받고 용서해주는 일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구분하여 말할 수 있다.
우선 상대가 용서받기를 원하는데 용서를 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또 혹자 가운데에는 상대방이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용서해 주는 사람도 있다.
상대가 용서를 구할 때 용서해주는 사람은 보통사람이며, 상대가 용서를 구해와도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옹졸한 사람이다. 또 상대가 용서를 구하지 않았는데도 용서해 주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다.
이렇게 볼 때 '나'라는 사람은 과연 보통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옹졸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 그것도 아니라면 위대한 사람 측에 속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무리 여유 없는 삶일지라도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사색으로 자성(自省)에 빠져 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용서하며 사는 사람이 축복을 받는다.
우리는 누구나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축복받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행동은 그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용서를 실천하는 삶이 하느님만큼은 못 된다 하더라도 용서하는 흐름으로 살아야 불행을 멀리 한다.
우연히 백범 김구 선생님의 생애에 관한 글을 읽었다. 가슴 뭉클하는 용서의 대목이 있어 소개해 본다.
김구 선생님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실 때에 일본인 헌병이 우리 한국 청년을 매수하여 김구 선생님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허나, 이 청년은 시간이 얼마 인 되어 붙잡혔고, 사람들은 청년을 처형하기 전에 그를 데리고 김구 선생님 앞에 나타났다.
"당신을 암살하려던 청년을 붙잡아 왔습니다"라고 하니까 김구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이 청년을 용서해 주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그 청년을 붙들고서, "내가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한 한국 청년을 여기서 만나다니 실로 감격스럽다"고 했다. 김구 선생님은 당신을 암살하려고 권총을 들었던 그 청년을 부둥켜안고서 기뻐했다.
만약에 내가 김구 선생님과 똑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더라면 나는 과연 어떻게 했을 것인가?
아마 상상하기에도 어려운 끔찍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독립군인 나를 죽이려 했다>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응징하려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원망과 증오로 얼룩진 복수심에 살기어린 눈빛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도 아니면 분노에 찬 증오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은근히 피가 마르게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 선생님은 당신을 죽이려했던 청년을 부둥켜안고 기뻐하는 모습으로 용서를 했다.
참으로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존경스럽기 그지없다.
그 바람에 청년은 김구 선생님의 하해 같은 포용력과 인품에 감동되어 독립군으로 끝까지 충성을 다하며 헌신했다.
이런 걸 본다면 김구 선생님은 그 사람 됨됨이가 참다운 용기를 가진 비범한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상대방이 극단적인 행동으로 자신을 죽이려 했을 때 그에 대해 복수하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다반사(茶飯事)이거늘 백범 선생님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관용과 용서로써 상대방을 감화시켜 당신 사람이 되게 했다.
우리 같은 범인이라면 분개하고 원망하며 앙심을 품었을 텐데 백범은 그런 작은 그릇이 아니었다.
우리는 남에게 관용을 베풀면 선처한 만큼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관용과 용서는 완악(頑惡)한 인간의 마음을 바꾸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놀라운 위력은 용서가 지니는 사랑의 정신에서 비롯된다.
용서의 위대함은 사랑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용서는 두려움을 이겨낸다. 또 그것은 미움도 증오도 초월하는 사랑으로 상대방을 내 편으로 만든다.
그러니 용서의 힘은 위대하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총과 칼을 이기는 용서'
총과 칼은 상대방을 제압 못해도 용서는 제압한다.
생각만 해도 경외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우둔한 사람은 총과 칼로써 상대방을 제압한다.
허나, 현명한 사람은 용서로써 감화시켜 상대를 자기편으로 만든다.
용서의 힘은 위대하다.
미움을, 증오를, 능가하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용서의 힘은 위대하다.
원수도 나를 따르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의 힘은 위대하다,
오욕칠정을 정화시켜 평화경을 만들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
보통사람? 아니면, 옹졸한 사람? 그것도 아니면, 위대한 사람….
'총과 칼을 이기는 용서'
내 것으로 만들어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남상선 /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전 조정위원
남상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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